발라드는 꾸준히 즐겨온 음악 장르다. 음악에 취미가 생긴 이후, 호기심에 이 장르 저 장르 다 들어봤다. 모던록, 헤비메탈, 팝록, R&B, 재즈, 포크, 블루스, 심지어 클래식에 힙합까지. 하지만 돌고 돌아 발라드로 회귀하곤 했다(어음발… 어차피 음악은 발라드). 그만큼 발라드는 보편성을 담지하는 음악이다. 록이나 재즈는 어떤 조건이나 마음가짐이 갖춰져야 듣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의 준비 없이는 소음처럼 들릴 때도 있다. 하지만 발라드는 그런 거 없다. 그냥 아무 때나 들어도 빠져든다.
발라드 음악의 정서적 본질은 슬픔일 것이다. 너무 슬퍼서 울고 싶을 때 들으면 감정이 더 배가된다. 속담에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라는 말이 있다. 발라드는 그렇게 ‘뺨을 때려주는 음악’이라고 하면 적절한 비유겠다. 슬플 때 나오는 눈물을 저어할 필요는 없다. 울음에는 감정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으니까. 때로 그것은 어떤 약물보다도 효과적인 치유가 되기도 한다.
혹시 지금 울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플레이리스트를 들어보시라. 확실히 울려드리겠다.
바닐라 어쿠스틱, <울컥해>
제목부터 벌써 울컥한다. 바닐라 어쿠스틱은 이름처럼 달달한 어쿠스틱 사운드에 장기가 있는 듀오다. 프로듀서 바닐라맨은 이제는 볼빨간 사춘기의 히트메이커로 더 유명하다. 보컬 성아는 가장 저평가된 가수 중 하나 아닌가 싶다. 정확한 발음, 깔끔한 고음, 풍성한 감정선을 고루 갖췄다. 이런 만능캐이다 보니, 팀의 정체성인 밝고 리듬감 있는 곡들을 잘 소화한다. 예컨대 이들이 리메이크한 <대화가 필요해>는 자두의 원곡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성아의 역량은 심금을 울리는 발라드에서 더욱 대폭발하는 것 같다. 이 곡이 그렇다. 잔잔하게 시작해서, 묵직하게 치고 올라가, 애절하게 터뜨린다. 이런 드라마틱한 전개는 듣는 사람의 감정을 더욱 요동치게 한다. 그걸 “훗 이런 발라드쯤 별것 아니”라는 듯한 보컬이 주도해 간다. 요컨대 제목, 편곡, 보컬의 모든 요소가 울게 하려고 작정한 노래 같다.
디어클라우드, <안녕 그대 안녕(Acoustic Ver.)>
발라드 보컬의 미덕은 호소력일 것이다. 청자의 감정을 뒤흔들,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목소리여야 한다. 그 점에서 디어클라우드의 나인도 빠질 수 없다. 다만 찐 록커를 발라더라고 하면 본인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의 허스키하고 다크한 톤의 보컬은 유독 애절한 발라드에 찰떡이니. 요즘 이런 스타일의 여성 보컬이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이 <안녕 그대 안녕>은 디어클라우드의 대표곡은 아니다. 모던록 밴드로서 그들은 몽환적이면서도 강렬한 사운드 - <얼음요새>, <넌 아름답기만 한 기억으로>… - 를 지향한다. 그에 반해 이 곡은 다소 평범한 록발라드다. 하지만 그래서 이 팀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2017년 정규 4집에 수록되었지만, 2021년 어쿠스틱 버전으로 재발매되었다. 이렇게 한 걸 보면 디어클라우드도 이 곡에 애정이 큰 듯하다. 꽤나 염세적으로 보이는 이 팀의 스산한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명곡이다.
짙은, <우리 그렇게 사랑했는데>
짙은은 내 최애 뮤지션으로 이 매거진에서도 상세히 다뤘다(이 글 참조). 그때 이 곡은 소개하지 않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짙은의 자작곡이 아니다. 짙은은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운용하는 작가인데, 자작곡이 아니라니 대표곡으로 꼽기 어려웠다. 그리고 가사가 짙은의 곡치고는 너무 평이하다. 역시 본인이 안 써서 그런가 보다. 특유의 섬세하고 문학적인 단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슬픈 발라드로서는 추천할만하다. 짙은은 앞서 소개한 성아나 나인처럼 뛰어난 보컬리스트라고 할 수 없다. 성아와 나인이 지배자로서 곡을 끌고 간다면, 짙은은 무임승차자로서 곡에 실려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 유약함(?)이 이 곡에서는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별 후의 기다림을 약속하는 곡의 심상이, 짙은의 허망한 목소리와 꽤 어울린다.
스웨덴세탁소(feat. 정기고), <목소리>
이름부터 특이한 팀이다.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이순재(스웨덴세탁소가 협업하고 싶다고 꼽은)가 팀명을 듣고 “별놈의 이름이 다 나오네”라고 촌평한 바 있다(ㅋㅋㅋ). 하지만 이들의 곡들은 튀지 않는다. 기타와 키보드로 만들어내는 간소한 사운드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선 안에서 대부분 머무른다. 사실 너무 보편적이라, 듣다 보면 그 곡이 그 곡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명곡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이순재는 아니지만 R&B신의 블루칩 정기고와 불렀다. 마음이 떠난 남자와 잡고 싶어 하는 여자의 무너져내릴 듯한 관계를 묘사한 가사가 일품이다. 특히 여자의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날 것 같아”는, 극한의 슬픔을 애써 담담히 표현하는 가사로 섬세함이 느껴진다. 남녀가 따로 부르다가 클라이맥스에서야 함께 부르는 구성도 좋다. 이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다르지만, 하고 싶은 말 - “결국 우리의 시간은 끝나겠지만, 되돌릴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름답게 기억할게.” - 은 같음을 상징한다.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구성이다.
스탠딩 에그, <나 오늘따라>
누구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팀이다. 이 팀의 메인보컬 에그 2호는 굳이 비유하면 정형돈과 닮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전혀 딴판이다. 이른바 고막남친 류의, 부드럽고 달달하며 깔끔한 보컬을 선보인다. 그래서 인디신에서 음색으로는 꽤 먹어주는 팀이기도 하다. 실력도 탁월하다. 앨범을 들어보면 그 다재다능함을 확인할 수 있다. 모던록, 애시드재즈, 컨트리 등 다양한 장르의 스펙트럼을 넘나든다.
하지만 역시 이 팀의 킬러 콘텐츠는 발라드다. 아마도 <오래된 노래> - 임영웅이 불러서 유명해진(ㅋㅋㅋ) - 가 대표곡이겠지만, 이 <나 오늘따라>도 그에 못지않다. 무엇보다 이 곡은 구성이 특이하다. 가사와 멜로디는 전형적인 한국 발라드인데, 편곡과 연주는 모던록에 가깝다. 특히 후반부의 불꽃 기타 연주가 귀에 확 꽂힌다. 이런 상반된 조합이 묘한 애절함을 만들어낸다. 슬픈 발라드의 공식과도 같은 요소들 – 마이너풍, 고음, 현악 중심 편곡 등 – 이 있다. 이 곡은 그런 전형성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슬픔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