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나만 그런가? 비 오는 날은 글이 잘 안 써진다. 하긴 감성을 자꾸 건드리는 이런 스산한 날씨에, 미국 국립연구소 글이 술술 나오면 그게 이상한 일일지도. 오래전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라고 했던 시인도 있었다. 가을날의 과학 글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만 작파하고 음악이나 들어야겠다. 가을 공기를 적시는 빗방울처럼, 건조함과 촉촉함이 공존하는 사운드의 곡들로.
Ben Folds Five, <Sky High>
피아노 기반의 록사운드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열정과 냉정이 균형감 있게 교차하는 느낌이랄까? 이 밴드는 거기에 감성까지 갖췄다. 원곡도 좋지만 라이브 연주가 그 감성을 더 잘 살린다. 영상에서 보듯 리더 벤 폴즈는 생긴 게 딱 너드다(미드 <빅뱅이론>에 나오면 잘 어울릴 듯). 하지만 목소리는 감미롭고, 피아노 연주는 감성에 파동을 일으킨다.
푸른새벽, <우리의 대화는 섬과 섬 사이의 심해처럼 알 수 없는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목 한번 길다. 근데 그 제목만으로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인디신의 거목이 된 한희정의 초창기 곡이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가성이 듣기에 편안하다. 마치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라며 차분하게 말을 걸어주는 듯하다.
Kazumi Tateishi Trio, <君をのせて(너를 태우고)>
비 오는 날에 재즈곡이 빠질 수 없지.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재즈에 취미를 붙여보고 싶었다. 재즈를 들으면 하루키마냥 글을 잘 쓸 수 있으려나 싶어서. 하지만 정통 재즈는 여전히 어렵다. 하루키가 쓴 재즈 에세이를 읽어봐도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팝 스타일의 퓨전 재즈는 일할 때 자주 틀어놓는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인기가 많은 이 일본 밴드의 연주곡도 마찬가지다.
9와 숫자들, <빙글>
이 곡은 <이별 중독(Farewell Addict)>이라는 이 밴드의 다른 곡을 각색한 것이다. 제목인 빙글은 싱긋 웃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별 중독>과 <빙글>이라, 두 제목이 상반된 듯하면서도 묘하게 뜻이 통한다. 나도 수많은 이별을 겪어서 중독될 지경에 이르면 빙글 웃을 수 있을까.
서사무엘, <연희동>
제목도 가사도 비와 무관하다(하긴 이 글에 소개한 곡이 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 끈적거리는 R&B 감성만큼은 비와 퍽 어울리지 않나? 특히 곡 곳곳에 붐치기 박치기 스캣을 넣는 부분이 킬포다. 재기발랄한 보컬 못지않게 사운드를 이끌어가는 베이스라인도 개성이 넘친다. 듣다 보니 연희동을 산책하고 싶다. 가사에도 나오듯 한적한 서울의 한 조각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