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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ug 27. 2024

삶의 저류에 흐르는 음악, 짙은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단조로운 내 삶을 채워주는 몇 안 되는 취미이다. 나는 매사에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인데, 음악 취향도 그렇다. 듣는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의 경계가 뚜렷하다. 여러 기준이 있지만 시대도 그중 하나인 듯하다. 주로 옛날 음악을 좋아한다. 1980~90년대를 수놓았던 록, 포크, 발라드, R&B는 자주 듣는다. 하지만 첨단 하이엔드 사운드로 무장한 K-팝과 아이돌 음악은 아는 곡이 거의 없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으로는 짙은을 꼽는다. 이 양반이 2005년 데뷔했으니 연식이 좀 된다. 그래도 비슷한 시기 등장한 버즈, SG 워너비, 윤하 등에 비해서는 덜 유명하다. 아무래도 메이저보다는 인디신에서 활동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장르적으로도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다. 짙은의 음악적 연원은 포크, 모던록, 발라드를 공통분모로 삼는다. 이로써 구현하는 어쿠스틱 사운드는 실험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쉽사리 귀에 날아와 꽂히지도 않는다.

      

짙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뮤지션이나 가수보다는 ‘작가’라서다. 여기서 말하는 작가가 곡을 직접 짓는 싱어송라이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만들어내는 가사, 멜로디, 사운드는 조화롭게 이어져 하나의 세계로 합일한다. 작가란 이렇게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짙은의 음악도 멜로디가 좋다, 편곡이 뛰어나다는 단편적인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잘 짜여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짙은의 작품 세계가 드러내는 심상은 밝지 않다. 팀 이름인 ‘짙은’이 사전적으로 강한 빛깔을 의미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세계는 어둡고, 서글프고, 허무하기까지 하다. 짙은의 곡 대부분이 이런 처연한 정서를 기본으로 깔고 있다. 내가 그의 작품들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도 내 삶을 지배하는 정서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내 삶에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그것들은 구조적으로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듯하다. 삶의 가장 낮은 곳, 어쩌면 근간이라고 할 깊숙한 그곳에는, 허무와 상실의 감정이 무겁게 침잠해있다. 하긴 나만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까. 짙은의 음악을 들으면, 삶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차갑고 어둡게 존재하는 나라는 본질을 마주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짙은을 이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그것은 삶의 저류에 흐르는, 나의 근원과 공명하는 음악이라고.



    

해바라기 (EP <Diaspora : 흩어진 사람들>, 2014년)

     

짙은의 모든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 삶에 존재하는 허무와 상실을 보편의 언어로 표현해냈다. 나는 은유의 작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곡의 가사만큼은 예외다. 해를 잃은 해바라기에 우리가 삶에서 겪는 다양한 상실감을 담아냈다. 그것은 이별, 죽음, 좌절 등 여러 의미로 읽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BGM으로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늘은 하늘로 그냥 머무르겠죠
구름은 어디로든 흘러가겠죠
난 어딜 봐야 하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
해지는 해바라기


Rock Doves (EP <Rock Doves>, 2005년)     


짙은의 역사적인 데뷔곡. 모던록 기반의 꽉 찬 밴드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아마도 초창기 성용욱-윤형로 2인조가 지향했던 음악적 포부일 테다. 성용욱 1인 체제로 바뀐 지금은 기조가 발라드에 가까워졌다. 데미안 라이스의 명곡 <Volcano>를 오마주한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리듬 패턴과 사운드 전개가 유사하다. 다만 자비로 제작한 앨범이라 그런지 녹음 상태는 아쉽다. 짙은의 작품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가사를, 의미 파악이 힘든 영어 문장으로 썼다는 점도 마찬가지.


Rock doves fly over
Rock doves fly over
Rock doves fly over
Rock doves fly over
Rock doves fly over
Rock doves fly over to your home


첫눈 (싱글 <사랑의 단상 Chapter 6 : 첫눈>, 2016년)

     

짙은의 발라드 중에 최고로 꼽는 곡. <잘 지내자, 우리>, <집>과 함께 대중적 소구력이 가장 큰 곡이기도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굳이 이 곡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첫눈을 묘사한 가사의 섬세함 때문. 첫눈은 흔히 설레고 로맨틱하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첫눈은 소복이 쌓이지 못하고 금세 흩어지거나 녹아내다. 그래서 첫눈이 온 날의 풍경은 예쁘기보다는 저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누구에게나 이런 첫눈 같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눈 녹듯 사라져버린 기억, 그 후에 찾아온 기나긴 겨울. 그래도 우리는 첫눈을 아름답게 의미화할 수 있을까.


바람이 거세지면 어디론가 흩어져
함께했던 기억도 잊겠지
바닥에 던져져서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나를 알는지


월정리 (EP <제주에 가면 vol.1>, 2021년)     


여행지로서 제주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히 볼 것도 없는데, 얕은 상술과 불친절이 판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제목으로 나온 짙은의 신곡이 처음에는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들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모티브가 된 월정리가 궁금해서 검색해봤다. 한적하고 아름다웠던 해변이 카페 거리로 탈바꿈하면서 사람과 자동차로 북새통이라고 한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까 가사의 의미가 온전히 다가왔다. 결국 이 또한 <해바라기>가 그렇듯 상실의 심상을 드러낸 것이다. 다만 그 표현 방법이 너무나 시적이어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짙은 성용욱은 나와 동갑이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런 문장은 못 쓸 것 같다.


오 그댄 박제돼버린 하늘
필름 속에 맺혀 버린 허상들
무너진 건물 이야기의 잔해들
끝에야 얻어낼 아름다운 문장


MOON (2집 <UNI-VERSE>, 2017년)     


제목처럼 우주(universe)를 주제로 한 앨범. 그것에 보편의 시(uni-verse)라는 중의적 의미를 덧붙인 센스가 돋보인다. 수록곡들도 죄다 우주에 관한 것들인데, 단연 최고는 이 곡이다. 사랑의 감정이 뜨거워졌다가 식는 과정을 달이 차고 기우는 현상에 비유했다. 짙은의 곡들은 이렇게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가 좋다. 쓸데없이 포장하거나 무리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편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와는 잘 맞는다. 어쩌면 짙은의 음악은 현실주의적 본질의 낭만적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 무슨 모순적인 조어냐고? 뭐 어차피 예술이란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소멸을 희망하는 허무한 기대도
완성을 향해가는 항해도
그 끝에 다다르면 마주하게 될 또 다른
나의 모습은 나를 모른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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