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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Oct 28. 2024

바람이 지나간 자리

한영애(2014), <바람>

나는 감정의 기복이 적은 편이다. 흥분감이 비트코인 고점 찍듯 치고 올라가는 일도 없지만, 우울감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일도 없다. 물론 사람인지라 감정의 등락이 없을 수는 없다. 그래도 대부분 오래지 않아 평정심을 회복한다. 나의 이런 성격이 마음에 든다. 단점도 있지만, 장점이 더 많다고 느낀다. 

     

그러나 가을만 되면 조금 가라앉은 상태가 된다. 평소보다 낮은 톤의 냉랭한 기분이 쭉 이어진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흔해 빠진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사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 같아 나의 성향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말이든 글이든 '하나 마나 뻔한 이야기'를 가장 싫어해서 그렇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 어쩌고 하는 실없는 소리를 나누느니, 그 시간에 브런치 댓글 하나를 더 달겠다.

     

가을의 나는 내가 봐도 유별나다. 이제껏 아내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하여튼 곰처럼 미련해서… (이 뒤에 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름)”다. 그런 나도 가을에는 예민해진다. 눈에 아른거리는 사물, 귀에 울리는 소리, 뇌에 기습하는 기억, 뭐 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된 후에는 가을이 더욱 반갑다. 가을에만 예민해지는 습성으로 인해 글도 잘 써지는 것 같아서다. 실제로 『최소한의 과학공부』도 작년 가을에 가장 많은 양을 몰아 썼었다. 반면 해가 갈수록 짧아지는 가을의 시간 때문에, 끝날 때는 많이 아쉽기도 하다. 다른 계절과 달리 가을만큼은 떠나보낸다는 느낌이 든다(작년 이맘때는 이런 글도 썼었다).

     

가을 하면 유독 바람이 떠오른다. 모든 계절에는 저마다의 바람이 있다. 그 바람들이 드러내는 심상은 계절과도 공명한다. 봄의 산뜻함, 여름의 시원함, 겨울의 혹독함… 가을은 아마도 스산함일 것이다. 이제 한 해도 이렇게 끝나고, 저 멀리 파장(罷場)의 겨울이 다가옴을 알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을에 바람이 불고 나면 공허함이 남는다. 

     

한영애의 <바람>은 이런 가을과 꼭 닮은 곡이다.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으로 불리는 한영애의 보컬은 언제 들어도 강렬하다. 많이도 필요 없다. 1988년(!!)에 나온 <누구 없소>와 <루씰>만 들어봐도 안다. 다만 2014년 발표한 <바람>은 한영애의 시그니처와는 거리가 있다. 전형적이고 평범한 발라드다. 그런데 그것이 한영애의 블루지한 목소리와 만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 느낌을 말하자면, 음악이 흐르는 내내 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리듬 파트가 두드러지지 않는, 피아노와 현악 중심의 공간감 있는 편곡이 쓸쓸함을 배가한다.

     

가사는 더욱 가을과 닮았다. 제목의 바람은 버림받아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그대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바람이 되어 그대와 함께 숨을 쉬겠다고 한다. 내가 바람이라면 어디든 그대를 따라갈 수 있으니. 최근 가요에서는 보기 힘든 처연한 가사다. 아마 20대 때였다면 이 가사를 안 좋아했을 것 같다. 버림받은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갖는 게 말이 되냐며. 하지만 나이가 든 요즘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사람이 하는 일이 꼭 이치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니까. 더구나 현실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순수한 감정의 사랑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다만 이해되는 것과 별개로,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바람은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가사에서 바람이 된 화자 역시, 그 사람이 가는 곳을 뒤쫓아 자꾸만 떠나야 할 것이다.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뭔가를 뿌리내리게 하기는 어렵다. 결국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공허함만 남는다.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화자의 다짐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혹시 작가는 이런 역설마저 의도하고 이 가사를 썼을까? 보컬, 연주, 그리고 가사의 오묘한 의미까지, 들을수록 가을 같은 노래다.

     

한영애의 <바람>을 들으며, 가을이 이렇게 간다. 올해는 유난히 더 공허한 기분이 든다. 지금 일주일째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서… 는 아니겠지. 바람의 냉기도 조금씩 짙어진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다. 하긴 단풍이 든다 한들 그 붉은 향연은 순간일 것이다. 어느새 만추의 늦바람마저 불고 나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또 한 번의 가을이 이렇게 간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처럼
아무리 흔들고 흔들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네처럼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언제든 힘이 들 땐 뒤를 봐요
난 그림자처럼 늘 그대 뒤에 있어요

바람이 되어 그대와 숨을 쉬고
구름이 되어 그대 곁을 맴돌고
비가 되어 그대 어깨를 적시고
난 이렇게 늘 그대 곁에 있어요

늘 그대 뒷모습만 익숙한
이 시간이 너무도 힘들지만
혹시 돌아볼까봐 늘 그댈 바라만 봐요

바람이 되어 그대와 숨을 쉬고
구름이 되어 그대 곁을 맴돌고
비가 되어 그대 어깨를 적시고
난 이렇게 늘 그대 곁에 있어요

항상 같은 자리에 서서
일생을 바보같이 기다릴 사람
그대가 있는 곳엔 달빛처럼 그대를
환하게 비춰줄 그런 사람

바람이 되어 그대와 숨을 쉬고
구름이 되어 그대 곁을 맴돌고
비가 되어 그대 어깨를 적시고
난 이렇게 늘 그대 곁에 있어요

난 이렇게 늘 그대 곁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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