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커피와 음악. 내가 꼭 무라카미 하루키를 흉내 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글쓰기는 예민한 작업이라 정신이 긴장과 이완을 수시로 반복한다. 그럴 때 커피와 음악이 도움을 준다. 커피는 글감과 문장을 짜내는 데 자극이 된다. 반면 음악은 쓰는 중간중간 한숨을 돌리도록 안정감을 준다.
둘 중 까다롭게 고르는 건 음악 쪽이다. 커피는 맥심이든 스타벅스든 빽다방이든 상관없다. 다만 음악은 장르와 형식에 제한이 있다. 비트가 강하거나, 템포가 빠르거나, 보컬이 두드러지는 곡은 안 된다. 가장 적합한 것은 서정적이고 울림이 적으며 가사가 없는 곡들이다. 내가 글을 쓰는 시간대가 밤이라서 더 그렇다. 남들 자는 야밤에 기타와 드럼과 고음이 난무하는 곡을 틀 수는 없잖은가. 결국 이 조건들을 만족하는 음악은 연주곡이다. 모든 일과가 끝난 한밤의 글쓰기에 배경처럼 흐르는, 내 ‘심야의 노동요’라고 할 수 있겠다.
에피톤 프로젝트, <환절기>
한때 에피톤 프로젝트를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꼽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요즘 신곡도 잘 안 내고 창작 역량도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아서다. 그를 대표하는 연주곡은 <봄날, 벚꽃 그리고 너>일 것이다. 광고 음악으로도 여러 번 쓰여서 에피톤 프로젝트를 모르는 사람도 익숙할 것이다. 근데 나는 영 별로더라. 제목도 오글거리고, 뭔가 작정하고 슬픈 곡을 만들겠다고 작업한 결과물 같다.
그래도 이 <환절기>는 여전히 자주 듣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처연하다’인데, 그 감정과 잘 어울린다. 담담하게 진행되는 피아노 연주를 듣노라면 스산함이 느껴진다. 환절기는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면서 마음가짐도 단단히 하는 시기이다. 그것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닥치는 상실과 허무의 감정에도 비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공연에 여러 번 갔지만 이 곡은 들어보지 못했다. 사실 딱 한 번 기회가 있었다. 어느 소극장 공연이었는데, 앙코르 순서가 되자 갑자기 즉석 리퀘스트를 받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곧바로 환절기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중년의 아재가 굵은 목소리로 그러자니 쑥스러웠다. 결국 “환절기…”라는 애매한 톤으로 말해버렸다. 문제는 동시에 저 앞의 어떤 여자가 “그대는 어디에!!!”라고 사자후를 토한 것. 그렇게 나의 리퀘스트는 완벽히 지워졌고, 이 곡을 라이브로 들을 소중한 기회도 날아가 버렸다.
히사이시 조, <Summer>
너무나도 유명한 곡. 이 곡이 OST로 쓰인 <기쿠지로의 여름>이라는 영화는 본 적도 없고 앞으로 볼 계획도 없다. 하지만 이 <Summer>만큼은 평생 들을 것 같다. <인생의 회전목마>와 함께 히사이시 조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원투펀치라고 생각한다. 이 곡은 피아노 솔로와 오케스트라 편곡의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물론 경쾌한 피아노 연주가 핵심인 곡이지만, 장중한 오케스트라를 입힌 버전이 더 좋다. 감정적으로 더 풍성하고 아련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 곡을 들으면 여름의 홋카이도가 떠오른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하얀 설경이지만, 여행 가기에는 여름이 더 좋다. 거기에 오비히로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넓고 푸른 평야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에서 초여름의 산들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때 이 곡이 bgm으로 깔린다면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얀 티에르상, <Comptine d'un autre été>
고백하건대 이 프랑스 뮤지션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우울하리만치 차가운 연주를 들려준다는 점 말고는. 영화 <아밀리에> OST에 수록된 이 곡도 그렇다. 시작부터 마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듯 퍼지는 피아노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참 들을수록 묘하다. 이 곡의 전개는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런데도 듣다 보면 감정에 파도를 일으킨다. 오랫동안 들어온 곡이지만 그 감정의 실체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슬픔인지, 허망함인지, 그리움인지, 회한인지.
트리오 토이킷, <Vanhojapoikia Viiksekkäitä>
북유럽 재즈 감성을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왜 그런 것을 검색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덕분에 대박 밴드가 얻어걸렸다. 핀란드 출신의 이 3인조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운드를 선보인다. 듣다 보면 도대체 곡을 어떻게 이끌고 가려는지 가늠이 안 된다. 장르적으로도 이게 재즈인지, 팝인지, 클래식인지 모르겠다. 이 곡은 그런 기본 바탕에 바이올린까지 추가되었다. 재지한 연주를 타고 종횡무진하는 바이올린은 전성기 리오넬 메시의 드리블을 연상케 한다. 클래식과 재즈 둘 다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 곡이 둘의 장점을 절묘하게 합쳤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김현철,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
김현철의 음악적 정체성은 ‘세련됨’이 아닐까 한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평범한 발라더(<일생을>, <연애>, <Loving You>…)가 되는 느낌도 있지만. 적어도 초창기의 그는 대중가요 유일의 스타일리스트였다. 김현철 1집의 <오랜만에>를 한번 들어보시라. 이 곡이 주현미의 <짝사랑>과 같은 해에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3집의 이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도 세련미를 찐으로 보여준다. 김현철 특유의 도회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시티팝 스타일의 연주곡이다. 실제로 횡계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저녁 하늘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을이 번지는 저녁 무렵의 드라이브에도 잘 어울릴 듯하다.
그의 음악은 참으로 듣는 즐거움이 있다. 그중 하나가 편곡적으로 심심할 틈을 안 준다는 점이다. 그만큼 악기들이 긴밀히 연결되고, 교묘하게 치고 빠지면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곡도 그렇다. 메인 선율은 기타가 이끌어가지만, 뒤에 있는 베이스, 드럼, 키보드, 색소폰의 역할도 작지 않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다 빈 곳이 생기나 싶은 순간 들어와 채운다. 마치 왕년의 스트라이커 필리포 인자기 같다. 단독 돌파는 못해도 귀신같은 위치선정으로 골을 넣는다. 이런 팀플레이의 결과로 재지한 전자 사운드의 대향연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