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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경제, 사유의 빈자리

by 배대웅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아온 편이다. 몸도 건강하고, 사고를 당하거나 트라우마가 생긴 적도 없으며, 가족들도 평안하다. 일 때문에 좌절하거나 재기불능 수준으로 실패한 경험도 없다. 한동안 고학력 백수로 살며 생계를 걱정했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것조차도 뒤돌아보면 감내 가능한 일상이었다. 인생은 내게 그다지 깊은 상처를 주지 않았다. 물론 나는 여전히 수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삶은 글감으로 쓰기에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브런치에 들어오면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브런치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있다. 삶이 뒤틀리는 절망, 생애 가장 어두웠던 시절의 고백, 일상에서 얻은 깊은 상처들이 글의 전면에 나선다. 그것들은 일회성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작가 소개란에 고정된 정체성으로, 글쓰기의 전제처럼 자리 잡고 있다. 고통이 먼저 자기소개를 건네는 풍경과 마주하며, 나는 자주 멈칫하게 된다. 나는 어떤 아픔도 내세울 수 없기에 글도 쓸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물론 고통을 드러내는 글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글쓴이의 자유이자 개성이며, 때로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브런치에서 고통이라는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좀 다른 문제가 드러난다. 그 고통이 공감의 강력한 전제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글의 완성도나 사유를 따지기보다, 일단 마음부터 내어준다. 슬픔을 감히 비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상처를 읽고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무심하거나 냉정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자신의 고통에 반응해주길 바라고, 독자는 공감을 보냄으로써 인간적인 독자로 남는다. 이 관계는 겉으로는 따뜻한 교류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언의 윤리적 압박에 가깝다.


나는 글을 읽을 때 작가의 개인적 사정이나 감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다. 문장 자체만 본다. 문장이 담고 있는 지식의 깊이, 사유의 밀도, 구성의 완결성만이 독해의 기준이다. 좋은 글이라는 판단은 그 기준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 때만 내릴 수 있다. 그것은 오직 내용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고통을 전면에 내세운 글은 이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절절한 고백 앞에서 완성도를 논하면 차갑고, 사유를 물으면 무례해 보인다. 이 순간 고통은 개인의 체험을 넘어 비평을 중단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개인의 글쓰기 습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브런치의 구조 자체가 이런 글쓰기를 낳는다. 브런치는 논리와 정보보다는 감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감정이 강한 글일수록 라이킷과 구독자 수를 확보하기 쉽다. 그러면 작가의 인지도와 명성도 상승하며, 궁극적으로 출간으로도 이어진다. 이런 구조에서 고통 서사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일종의 거래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감정이라는 상품을 진열하고, 독자는 공감이라는 화폐로 응답한다. 자발적 선의의 교환이지만 본질은 이익 창출의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이 교환이 활발할수록 브런치도 클릭과 반응과 체류시간을 얻는다. 브런치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경제’다.


이런 환경에서 글쓰기는 자기연민의 상품화로 기울기 쉽다. 감정은 표현이 아니라 전략이 되고, 상처는 체험이 아니라 자원으로 바뀐다. 작가는 반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더 깊이 노출하고, 독자는 공감에 참여함으로써 관계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이 교류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감정은 계속 순환해도 의미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위로는 사라지고, 피로만 쌓인다. 이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건강한 생태계가 아니다.


결국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감정을 털어놓기 위해서인가? 독자의 공감을 얻어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인가? 나는 감정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성이 곧 글쓰기의 완성은 아니다. 고백이 용기라는 말은 진실일 수 있지만, 모든 용기가 서사를 낳는 건 아니다. 글은 고백의 소비를 넘어서 생각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 감정을 진열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고 의미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글쓰기가 사유로 나아갈 수 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고백도 권력관계를 내포한다고 했다. 고백도 승인의 대상을 전제로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진짜 글쓰기는 그 권력에서 벗어나는 기술이어야 한다. 감정의 진열이 아니라 사유의 발견을 이루는 일. 그것이야말로 대 고백의 시대를 통과하는 작가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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