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인데 벌써 초여름 날씨다. 습하고 더운 기운을 확인시켜주듯 걷는 내내 땀이 흘렀다. 세검정을 거쳐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자 그나마 숲의 푸른 잎사귀들이 그늘을 만들어 준다.
언젠가 한여름에 들었던 백사실 계곡은 이렇게 덥지 않았다. 장마 후였던가. 그땐 계곡에 물도 제법 많았다. 이 동네 살던 선배가 마음이 지친 나를 이끌 듯 데려가 준 백사실 계곡을 한가롭게 걸으며 ‘아,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새삼 감탄했던 곳.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별서터에서 내려다본 연못은 물이 바싹 말라 바닥까지 드러낸 자리에 고마리만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항복의 호가 백사(白沙)였구나.
‘경치 좋은 곳들엔 죄다 높으신 분들의 별장이 있었군.’
살짝 삐딱한 생각이 일었다. 우렁우렁 물소리와 서늘한 바람 속에서 걷던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가뭄이 마음조차 말라붙게 하는지.
바위를 끼고 넘는 물소리가 커서 '수성(水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수성동 계곡도 매한가지였다. 이름조차 무색하게 졸졸 흐르는 계곡물을 못내 아쉬워하며 내려서는 길, 겸재 정선의 장동 팔 경첩 중 ‘수성동’이라는 작품과 아스라이 겹쳐지는 풍경을 만났다. 기린교를 감싸 안은 인왕산의 풍경이 절묘하다.
널찍한 수성동 계곡 입구에서 잠시 쉬며 여기저기 둘러본다. 그때 음수대 근처에서 발견한 안내 표지판의 생뚱맞은 단어의 조합, 주황색 네모 표시까지 해놓은 ‘아파트 흔적’이라는 글씨다. 무슨 사연이 있어 아파트 흔적을 다 남겨놓았을까. 마침 따라오라는 듯 갈색 털의 고양이 한 마리가 화살표 방향의 계단을 펄쩍 뛰어오르다 말고 휙 돌아본다. 나는 홀린 듯 뒤따라 뛰어올라 안내판에서 백 미터 남짓 가파른 언덕에 남아있는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야 말았다.
‘아파트 흔적’은 말 그대로 아파트 흔적이었다. 전쟁의 상흔이라도 되는 양 시커멓게 얼룩진 콘크리트 벽체의 일부에는 타일이며 콘센트 자리까지 남아 있었다. 1971년 다닥다닥 붙어있던 판자촌을 허물어버린 뒤 계곡 위에 시멘트를 쏟아부어 순식간에 지은 옥인시범아파트 자리라고 한다. 문화유산의 보존이나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살필 경황이나 여유도 없이 그저 개발에만 한창 열 올리기 시작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2011년 사십 년 만에 시멘트 덩어리에 묻혀 있던 수성동 계곡을 복원하기 위해 아파트를 철거하면서 난개발에 대한 자성의 의미로 남겨놓은 잔해라고 했다.
1971년 허물어진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쫓겨나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11년 옥인아파트를 나가야 했던 사람들은 또 어디로 떠나갔을까. 그들이 원한 일이었을까. 문득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서울의 아파트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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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봄, 어렵게 서울에서 두 번째로 구한 집이었다. 출퇴근의 편의성을 생각해 지하철 2호선 주변을 오래 걸어 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집값이 비교적 싼 편이라고 전해 들은 뚝섬역, 성수역, 건대입구역 주변부터 샅샅이 뒤졌다. 충청도의 작은 시골서 나고 자란 내게 거기서 만난 서울은 여러 모로 놀라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반지하 방의 쇠창살이 박힌 창, 작은 평수의 다가구 지하 단칸방에 고만고만한 꼬맹이 셋을 키우는 가족이 살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대부분 ‘우리집’에 살았다. 허름해도, 비록 내 땅이 아니어도 집은 본인 소유였다. 아버지 때부터 혹은 할아버지 때부터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집. 지하에 방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가지고 있는 돈은 그 반지하 단칸방이 딱 맞았지만, 큼큼한 곰팡이 냄새를 피해 나는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없는 나는 옥탑방에 살면 살았지 지하는 못 살겠다 큰소리쳤다.
걷고 또 걷고 구의역과 강변역 근처에서도 돈에 마땅한 집을 찾지 못했을 때 문득 지하철을 타고 오며 얼핏 보았던 그 낮고 낡은 아파트가 떠올랐다. 1978년, 도시 철거민과 무주택자를 위해 서울시가 지었다는 잠실시영아파트.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너 성내역에서 내렸다. 외벽 칠을 안 한 지 십 년은 넘었는지 군데군데 금이 가고 칠이 벗겨진 5층짜리 아파트는 곧 재건축에 들어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곳이라면 조금 가격이 맞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역에서 가장 가까운 부동산에 들러 혹시 전셋집이 있는지 물었다.
비어있는 집이 많았다. 지하 단칸방보다 싼 값으로 방 두 개에 작은 거실과 주방이 딸린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계약서에는 특별히 한 줄이 더 추가되었다. ‘재건축이 결정되면 바로 나가겠다’는 조건. 어차피 당장 살 집이 필요한 우리에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건축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지 십 년도 넘어 언제 재건축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소문도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년에 한 번은 옮겨야 하는 전셋집이라 별 상관도 없다.
빈 집을 지키던 개미떼와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살충제를 뿌린 후 하루 종일 걸레질을 하고 나서 동생 친구들을 불러 4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삿짐을 날랐다. 그날 저녁 모여 앉아 고기를 구워 먹으며 “우리도 이제 서울 아파트에 산다!”고 자매들과 얼마나 깔깔거렸는지.
사는 동안 집주인과는 얼굴은커녕 전화 통화조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대신 이 아파트를 다섯 채쯤 소유하고 있는 의사라는 이야기만 집을 관리해주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아파트 소유자들은 대부분 거기 살지 않았다. 근처 올림픽선수촌아파트나 강남에 살면서 같은 아파트를 몇 채씩 사놓았다고 했다. 아파트에 직접 살고 있는 소유자는 딱 한 사람 만났다. 옆집에 혼자 사는 옥신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이 아파트가 처음 지어졌을 때 입주해 이십 년째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자녀들은 모두 장성해 집을 떠났다. 이웃들도 하나 둘 이사를 가고 할머니만 덩그러니 남겨져 외로웠는데 시끌벅적 자매들이 이사 왔다며 좋아하셨다. 우리는 시골에서 음식을 싸오면 나눠 먹었고, 할머니도 가끔 전이나 나물을 무쳐 현관문을 두드렸다.
낡고 좁은 집에서 우리는 날마다 추억을 쌓아갔다. 울적한 밤이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가 시커먼 강물을 바라보며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우리나라 최초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강변 CGV에 우르르 몰려가 영화를 보고는 한 정거장인데 걸어갈 수 없어 아쉬워하며 툴툴거리다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넜다. 서울에 볼 일 있는 고향 친구들에게 우리집은 기꺼이 여관방이 되어주었다. 서울 사는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온 친구가 우리집에서 자고 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산병원에서 간호사 실습을 하는 동생 친구가 한 달간 머물고 떠나자 다른 동생의 친구가 들어와 한 달을 더 살았다. 제과제빵 공부를 하던 사촌동생도 한 달 넘게 우리집에서 살다 나갔다.
처음 세 자매가 살던 집에 대학 진학한 막내까지 합세해 네 자매가 살았던 잠실시영아파트 84동 404호.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았고, 2002년 월드컵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즈음 바로 그날이 닥쳤다. 집주인들은 재건축 허가에 기뻐하고, 세입자들은 말없이 떠나야 하는 바로 그날!
“이제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하나?” 걱정이 많던 옆집 옥신 할머니는 결국 우리보다 먼저 아파트를 떠났다. 다시 짓는 좋은 아파트에 들어가 살지 못하는 집주인도 많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름만 걸어두고 세를 준 집주인들만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 살거나 시세차익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멀지 않은 삼전동에 월세를 얻어 나간 후 그 아파트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지켜보았다. 콘크리트 건물이 모두 사라진 빈 터를 보며 내가 5년 넘게 살았던 허공의 어느 지점을 가늠해 보았다. 휑한 마음에 가끔은 그 추억들을 줄줄이 끌어올려줄 작은 흔적 하나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수성동 계곡의 옥인아파트에 얽힌 이야기는 서민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집의 흔적은 사람의 흔적이고 삶의 궤적이다. 판자촌이 사라지고 옥인아파트가 세워진 것도, 한순간에 허물어버리고 다시 수성동 계곡을 복원시킨 것도 모두 사람이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다. 일찌감치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한 어떤 이는 흉물스러운 아파트 흔적을 남겨 많은 이들에게 난개발의 오류를 각인시키고자 하였을 것이고,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어떤 이는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고향을 찾듯 그 흔적을 찾아갈 것이다.
요즘도 나는 가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이름이 바뀐 잠실나루역을 지날 때면, 그 시절 성내역과 낡은 아파트 안의 내 청춘을 떠올린다. 옆집 옥신 할머니도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시려나, 나의 보금자리가 있던 그 자리는 무슨 아파트 몇 동 몇 호일까, 거긴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별별 생각들이 다 떠올라 슬며시 웃음 짓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