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동네 바라보기
그간 며칠을 눈뜨면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이삿짐을 뒤적이며 닦고, 쓸고, 정리하고, 버리고 하는 일을 눈을 뜨고 있지 못할 때까지 반복했다. 이사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3일 정도 후면 정리된 집에서 묵상 시간도 가지고, 사람들이 준 편지도 읽어보며 여유롭게 여행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애송이의 생각이었다. 충분히 버리고 왔다 생각했지만 20년 묵은 짐은 만만치가 않았다.
오늘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쌓여 있는 숙제에 박아 둔 머리를 들어 숨을 쉬어 가기로 했다.
우선, 이사하고 처음으로 새벽 산책을 하며 수련을 갔다. 루틴을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명확히 보인다. 살던 동네와 이곳 민락동의 공통점은 수련원을 향하는 길이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점이다. 경복궁에서 삼청동 요가원으로 가던 길에 떠오르는 해를 향해 걷는 것이 좋았다. 떠오르는 해가 간밤에 쌓인 모든 것을 살균해 주듯,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민락동에서 해운대로 건너가는 방향으로도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점은, 종로에서는 동그란 해가 바로 보이지만, 이곳에서는 바다 위로 짙게 낀 해무에 해가 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또, 부산에서는 인왕산의 물까치는 볼 수 없다. 대신, 갈매기와 물닭이 강 하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날 만나러 오면 해 뜰 무렵 여길 같이 산책할 테야 생각했다.
보령에 계신 목자 언니의 가족들의 이름을 읊조린다. 그들의 구원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나의 가족들의 이름을 묻고 그 이름을 위해 기도하겠다 했다.
모든 인간이 무엇인가를 믿고 산다. 신, 돈, 지식, 명예, 노력, 도덕… 그 신념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고 산다. 그 신념에 도달하는 것이 곧 각자의 구원일테다. 그래서 제각각 모두 옳지만, 서로는 부딪힌다. 개개인은 신념대로 살아가지만, 모두가 다른 법을 따라 살기 때문에 전체로 보면 엉망인 것이다.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는, 정말 그 구원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욥은 고통을 당하며, 그 고통을 뚫고 하나님 앞에 항변하려 한다. 고통을 찢어 넘어가는 그의 몸부림, 그 안에서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주권자로 알고, 남아있는 자신의 생명마저 걸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고난 받기 전에도 욥은 늘 신실했다. 차분하게, 성실하게,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릇된 것 없이 늘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런 욥에게 까닭 없는 고난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는 통로였지만, 그러한 평가는 그 고통 자체의 무게와 중요성을 소거해 버리는 너무나 쉬운 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어쩌면 욥이 겪은 고통을 내 삶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 없는 욥의 고통은 죄 없는 예수의 십자가와 이어진다. 매사에 이유와 납득을 요구하는 나에게는 정말 어렵다. 결과론적인 이유는 알기 쉽지만, 그 과정에 서는 것… 그것을 모든 자녀에게 요구하시고 계실 텐데, 여전히 나는 아주 작은 상처에도 정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내 방식으로 합리화를 하는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들, 엄마와 남편의 사소한 불편한 행동에도 늘 이유를 묻고 지적한다. 남의 행동을 교정해서 내 불편한 감정과 일의 양을 줄이려고 한다.
내 편익과 이해에 집중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감사하고 싶다.
수련이 끝나고 다시 동네로 돌아오며… 이런저런 감사한 일들을 떠올렸다. 떠나올 때는 떠난다는 것에 집중되어 아쉬운 것들만 많고, 보지 못하던 새로운 일들… 이렇게 안전하게 지낼 주거지를 주시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공동체를 주시고, 부모님과 가까이 지내며 서로 의지하며 영향받을 수 있는 관계로… 목자 언니가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 문제를 너머 주변의 구원으로 확장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새 일에 열려 있고 싶다.
이웃집에 작은 쿠키라도 돌릴 생각으로 동네 제과점을 찾았다. 빵집 바로 앞에서 큰 재래시장을 발견했다. 이 동네에도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여유가 된다면 오후에는 바다를 향해 걷고 싶어졌다. 종로를 사랑했듯, 이 동네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오래오래 또 누군가를 알아가고 친밀해지면 좋겠다.
청아한 모습으로 깍깍 울던 파란 물까치를 볼 수 없다며 아쉬워하고 텅 비어 가던 마음에 파란 바다 위의 붉은 햇빛과 짙은 해무, 그 사이를 날아가는 갈매기, 강 하구 어딘가에 옹기종기 모여 쉬는 물닭의 모습에 몽글몽글 애틋한 마음이 피어오르길.
2023년의 끝이 다가온다.
ps. 이 동네에 잘 적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 이유
1) 농부의 마음을 따라 빵을 굽고, 요리하고, 커피를 내리는 분들을 발견했다.
2) 오래되고 후미진 곳들이 아름답게 꽃피고 있다.
3) 산과 바다가 가까이 있다.
타타 에스프레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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