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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Sep 12. 2022

살림하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홈메이드 미국생활

9월의 첫 월요일인 노동절(Labor Day)이 지나면 미국 동부의 학교들은 일제히 새학년을 시작한다. 올해 첫 등교일인 화요일은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왔고, 여름은 한순간에 놀랍게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이들도 새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6월 초에 예전 학교가 방학한 지 3개월만의 등교다. 노동절의 긴 주말이 시작하기 직전 금요일에 싱가포르에서 부친 이삿짐이 배달되어 왔다. 싱가포르를 떠난 지 두 달 만에 다시 내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에 (재)정착하고 있다.


나라가 바뀌었으니 가족들의 모든 생활방식이 뭐 하나도 그대로일 수가 없다. 알고 왔으니 놀라움은 없다. 오히려 기대했던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기꺼워하는 중이다. 제일 큰 변화는 다시 내 손으로 살림을 하게 되었다는 것.


싱가포르의 지인들은 내가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이젠 메이드가 없어서 어떡하느냐며 안타까워해 주었다. 싱가포르에서 십여 년 살던 주부들은 메이드가 있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도저히 싱가폴을 떠날 수 없다는 말도 종종 한다. 그런데 막상 미국으로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더 이상 메이드가 없다는 것이다.


1. 집안을 유지해야 하는 기준이 낮아진다.


전업주부가 있는 4인 가족이 사는 아파트였다. 살림이 쉬운 건 아니지만 그리 많지도 않았는데, 고용인을 놀릴 수 없다 보니 계속해서 일거리를 만들고 시켜야 했다. 집안을 반짝반짝 유지해야 하는 기준은 한없이 높아졌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일하기 무리스럽지 않고 내 기준에 만족스러운 정도까지가 기준이 된다.


청소와 정리는 내가 원래 잘하고 좋아하는 영역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된다면 물론 편하다. 그렇지만 집안 구석구석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내가 알아야 하는데, 기본적인 유지보수를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면 이런저런 현황을 내가 자연스럽게 알기 어렵다.


요리는 내가 싫어하는 영역이라서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요리를 남에게 맡기더라도, 매일의 메뉴를 선정하고 장 볼 목록을 지시하는 것은 여전히 내 일이었다. 머릿속으로는 내가 기획하지만 손발 노릇을 남에게 맡길 때는 언제나 일정 부분 '맘같이 되지 않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뿐인가. 누군가에게 매일 무언가 요리할 것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식당에서 주문하듯 이름이 붙은 음식을 시켜야 했고, 거기에 필요한 주재료와 부재료를 매일 사들여야 했다.


이제는 재료가 있는 대로 음식을 만들면 가족들은 주는 대로 먹는다. 메뉴 선정과 장보기, 음식 만들기와 남은 음식 재활용이 한 사람 담당으로 일원화되었기 때문에 전체 과정도 단순하고 식재료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음식은 간소해졌는데 아이들은 더 맛있다고 좋아한다. 작은 걸 하더라도 조금 더 맛있게 먹여 보려는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또는 맛이 없어도 불평 없이 먹는다. 이전에는 맛이 없으면 탓할 사람이 있었다. 탓을 안하더라도, 이번 음식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마음에 안 들게 되었다고 알려야 했다. 만드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 있을 때의 부작용이다. 그런데 불평이란 입 밖으로 내놓으면 진짜가 되는 것이라, 말로 표현하면 마음 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났다. 이제는 그 마음의 갈등이 사라졌다.


2. 가족들에게 일을 나누어 시킨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대청소를 한다. 1층과 2층을 청소하는데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불러 먼지 털기, 청소기 돌리기, 젖은 대걸레질, 화장실 변기 및 수전과 거울 닦기 등등 일거리를 나누어 준다. 정해진 역할을 한 번 맡은 사람이 계속 같은 일을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일단은 다양한 일을 배운다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돌아가며 하고 있다.


그동안은 작은 아파트에 나와 메이드까지 있으니 남편과 아이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집안일이 저절로 굴러가는 게 영 찜찜했다. 물론 그 때도 교육 차원에서 집안일을 시킬 수 있었지만, 환경이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에서 시키는 것도 억지스럽고 가족들이 일을 거드는 게 도움은 커녕 오히려 방해가 됐다. 가족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 자체가 내가 관리해야 할 또 다른 일이 되기 때문에 싫었는데, 이제는 다들 나서 한 몫을 하는 게 도움도 되고 가족들에게 잔소리를 하며 나의 통제본능도 충족된다. 하하하.


적당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집안일을 통해 독립심과 책임감을 키우는 것은 물론 손재주와 일머리를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고, 온 가족이 같이 집안일을 하는 게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오전 활동으로도 좋다.


3. 몸을 움직여서 일하며 자기효능감이 증가한다.


여태까지는 집안일을 하는 게 가족들에게 좋은 이유를 들었다. 집안일의 실행이 효율적이 되고 식자재 구입 등의 생활비가 절약되며, 간소하지만 정성이 담긴 음식은 더 맛있어지고 (나만의 착각일지도!) 맛있지 않더라도 불평 없이 감사하며 즐겁게 먹는다. 그리고 온 가족이 매주 함께 대청소를 하며 집안일은 우렁각시가 와서 하고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족에게 좋은 것 말고 나에게는 어떤가? 고용인 한 사람을 관리해야 한다는 행정 및 기획의 부담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노동이 사라진 대신, 독박가사를 옴팡 뒤집어쓴 게 아닌가. 미국에 온 뒤로 물이 자주 닿아서 그런지 손이 좀 거칠어진 것 같기는 하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손톱도 많이 상했고.


그렇지만 아직은, 직접 살림하는 것이 좋다. 내가 직접 일하니 집안일의 기준이 적당히 낮아진 것도 있고, 싱가포르와 달리 미국은 남의 도움 없이 각자 자기 살림 하면서 사는 나라라서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기가 더 수월하고 재미있다. 자기 차를 끌고 장을 보기 편리하고, 신선하고 다양한 식자재가 가득한 수퍼마켓에 오면 요리에 대한 의욕이 조금은 솟아난다. 그뿐인가, 싱가포르에 비하면 세탁기와 건조기, 식기세척기 등 빌트인된 가전제품도 성능이 흘륭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몸을 움직여서 생활을 유지하는 게 사람을 활기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아침에 운전해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어질러진 집안에 널브러져 커피를 마시며 느긋한 평화를 즐긴다. 다시 일어나 집안을 한 바퀴 돌며 간단히 정리하면서, 내 손이 닿는 곳마다 눈에 보이고 의미있는 변화가 생기는 게 뿌듯하다.


내가 눈치볼 다른 사람이 없으니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생기면 집안 정리 따위는 내버려둘 수 있다. 오늘처럼 오랫만에 글을 쓴다거나, 약속이 있어 외출한다거나 할 때 말이다. 좀더 욕심이 생기면 얼른 집안 정리를 마치고 다른 일에 몰두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라도 하루에 한 번은 집안을 리셋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집안이 깔끔히 정리되고 맛있는 저녁식사가 준비되면 오늘 하루는 잘 보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하루 잘 보낸 것이 눈에 보인다는 게 살림을 맡은 사람의 즐거움이다. 내가 통제본능이 강한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가끔은 생각한다. 이렇게 아이들을 건사하고 집안을 정돈하며 사는 게 내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였나? 이걸 꿈꾸며 자라고 공부하며 젊은 날 미래를 준비했었나?


그렇지는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을 때까지도 이렇게 하루하루 가정을 정돈하며 사는 인생을 상상하진 않았다. 아이들 어릴 때 몇 년 간 바짝 고생하고 그 후로는 가사와 육아를 남편과 반반 나누고, 직장과 가정과 나를 위한 시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면서 살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집은 아이들이 클수록, 그리고 가계부의 규모가 커져 갈수록 더 가정을 유지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전업주부 한 사람이 반질반질 유지할 수 있는 삶의 질을 각종 사람을 고용하고 서비스를 구매해서 조달하려면 비용 또한 상당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커리어와 가정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종종거리며 살기가 싫어졌다.


잘 하며 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좋다.


그리하여 오늘이 좋으면 내일도 좋을 것이라는 기대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싱가포르 드림>(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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