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데이비드 엡스타인
<Range>는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었다.
성공을 거두는 전략은 일찍 시작하고, 그 일에만 집중해서, 최대한 많은 시간 효과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스포츠 신동과 음약 영재들이 그렇게 해 왔다. 세상이 말하는 이런 성공법칙은 자기계발뿐 아니라 자녀양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1만 시간의 법칙," "의도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 "그릿(Grit)," "마쉬멜로우 효과" 등은 육아서에도 흔히 등장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작가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수많은 연구결과와 예시를 통해, 인생은 그렇게 매끈하게, 일찌감치 길을 정하고 꾸준히 집중해서 노력하면 예상했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사람의 인생이, 그리고 오늘날의 세상이 스포츠나 클래식 음악의 세계처럼 정해진 규칙이 있고, 연습할 때마다 곧장 교정을 받으며, 매번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분야에서 게임의 규칙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반복적인 패턴이 있는 것도 아니며,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당장이 아니라 느지막이 받게 되거나, 평가 자체가 그다지 정확하지도 않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뜻을 정하고 십 년 동안 흔들림 없이 글쓰기 연습에만 집중해서 명필이 되는 한석봉 같은 방법은 지금 세상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야기.
대신 작가가 추천하는 전략은 두루 돌아가며 천천히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다. 이렇게 요약하니 베짱이가 따로 없다. 그렇지만 설득력 있다. 세상은 아주 빨리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도 (생각보다 빨리) 변한다. 나에게 잘 맞는 게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알기 전에 엉겁결에 정한 목표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하염없이 매달릴 필요는 없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내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샘플링 과정, 그리고 이게 아니다 싶을 때 얼른 손절하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결단력도 끈기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배움이 꼭 빠르고 효과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는 쉽고 빠른 배움은 길게 보면 그 효과가 쉬이 사라진다. 결국 오랫동안 남는 것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라서 도대체 당장에 효과가 없었던 어렵게 배운 것들이다. 그래서 독학을 통해 스스로 익힌 것이 가장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부모나 선생에게는 환영받기 어려운 주장이다. 눈앞에 얼른 나타난 성과가 깊은 배움이 아니라면, 효과 없이 빙빙 돌아가는 비효율적인 것이 오래 남는 진짜 배움이 된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하고 인도해야 하나? 오랫동안 성과 없이 헤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 (David and Goliath)>을 같이 읽었다.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왜 때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Range>와 딱 연결되는 한 가지 개념이 있다.
"바람직한 역경 (Desirable Difficulties)" - 당장은 배움을 더 어렵고 느리게 만들지만 결국은 더 나은 성과를 가져오게 하는 장애물을 의미한다. 글래드웰은 난독증, 불우한 어린 시절, 전쟁이나 차별 등을 예로 들었고, 엡스타인은 당장은 비효율적이지만 배운 것을 더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몇 가지 학습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반듯한 정석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동안 장기적 학습효과가 올라가고 학습자를 더 강력하게 만든다는 게 그 원리다.
책으로 읽을 때는 훈훈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법.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 특히 자녀를 대상으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일단 어느 정도의 역경이 아이를 망가뜨리지 않고 더 강하게 만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안다 해도 또 어떻게 아이들에게 그걸 의도적으로 준단 말인가? 이미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때는 마음에 위안이 될지 몰라도. 그리고 글래드웰의 책에 등장한 예시만 봐도, 역경에 처한 모든 약자들이 다 그걸 성공적으로 극복해서 거인이 된 것은 아니다. 고생만 하다 가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모호하다. 성과가 빠른 시간 내에 측정 가능하지 않다면 도대체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과연 잘 선택한 것인가? 옳은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주변을 둘러봐도 비교할 수 없고 정해진 답도 없다. 모호하면 끊임없이 불안과 싸워야 한다. 그런 이유로 앞서 언급한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나 안젤라 덕워스의 <그릿>과 달리, 모호함과 다양함으로 가득한 이 책은 자기계발 및 자녀교육 분야에서 크게 유행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책 제목인 <Range>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 책의 부제인 "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네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 (Why Generalists Triumph in a Specialized World)"가 바로 Range다. 다양한 경험을 통한 폭넓은 사고. 이렇게 쓰면 너무 뻔하지만 과연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유연하고 폭넓은 생각이란, 한 분야에서 배운 것을 전혀 다른 분야에 적용해서 경험하지 않고도 문제 해결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창의성이다.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려면 사람은 다양한 취미와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깊은 수준까지 파고들어야 하며, 열린 마인드를 갖고 있어 한 곳에서 배운 것을 다른 곳으로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시도해 본 경험의 폭. 그걸 여기에서 저기로 연결시킬 수 있는 생각의 폭. 그게 바로 Range다.
이 책은 요즘 14살 11살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때로는 기특하고 믿음직스럽고, 때로는 이게 괜찮은 건지 불안하던 나의 두 가지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었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어려서부터 어느 한 가지 종목을 꾸준히 연마하지 못했다. 한국은 공부를 선행한다면 미국은 예체능을 중심으로 각종 특별활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종목에 따라 빠르면 초등 고학년, 늦어도 중등 졸업 쯤에는 나 이거 합네~ 하고 내세울 게 있는 아이들이 많다. 역산하면 초등 저학년, 늦어도 초등 졸업 쯤에는 난 이걸 하겠네~ 를 결정해야 된다.
얼마 전에 만난 분이 입시컨설팅 사업을 하는데 대상은 6-8학년(=중학생)이라고 한다. 고등학생은 이미 컨설팅하기에 늦었기 때문이란다. 대입 원서에 써서 지원자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스펙을 만들려면 고등학교 때는 이미 성과를 거두어야 하고, 그러려면 늦어도 중학교 때는 시작해서 시간이 비교적 많을 때 실력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하... 저희 아이들은 다 됐네요."
"첫째는 좀 늦었어도 둘째는 아직 시간이 있어요. 왜 어머님이 먼저 포기하세요?"
"아, 네......"
두 아이가 다 십대가 되어 보니 각자의 개성이랑 재능이 보인다. 그런데 그게 매끈하게 선택-집중-성과의 직선그래프를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재능은 내가 선생 붙여 레슨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본인들이 혼자 배우고 혼자 연습하는 영역에서 나타난다는 걸 깨닫고 있다. 무슨 재능이라고 딱 잘라 이름을 붙일 순 없는데, 거기 있기는 있다.
아이들이 자라는 걸 관찰하면서 내가 느끼는 것이랑, 세상이 인터넷이 그리고 다른 학부모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달라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믿는 부분과 불안함을 느끼던 부분을 설명하고 연결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아담 그랜트의 "Creativity may be hard to nurture, but it's easy to thwart" 라는 말을 인용했다. 창의력은 키워주기는 어렵지만 망치기는 쉽다.
그동안 정성껏 키운 아이들이 십대가 되어 각자 자기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바람직한 역경은 주지 못하더라도, 아이들 앞의 어려움을 다 해결해주려는 부담을 갖지 말고 각자의 고유한 모습을 망치지 말아야지. 한발 앞으로 성큼 다가온 중고등학생 육아를 더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그재그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살아온 내 인생과 경력에 대해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인생은 우상향으로만 뻗는 직선그래프가 아니고, 누구도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