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방 47기 11일차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일이 많아 피로가 쌓이면 사람은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게 날 선 반응을 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가족, 친구, 애인을 챙기느라 나는 뒷전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을 때도 부쩍 짜증이 많아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왜 짜증이 날까?’라는 고민의 답을 단순히 타인에게서만 찾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짜증 나게 한 것이라고 문제를 끝맺어 버리기 일쑤이지요. 사실은 내 몸이 무척 피곤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 시작된 짜증인데도요.
- 너를 미워할 시간에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윤서진)
Q.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만큼, 자신도 돌보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3년 전쯤 받았다면 남몰래 눈물을 펑펑 흘렸을지도 모른다. 나를 돌본 적이 있었나 생각하면서 자책했을 것도 같다. 그리고 필사 문장을 곱씹으며 결국 또 내 잘못이란 말이냐며 흥칫뿡을 남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 처음 질문을 읽고는 그럼, 당연하지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내 시간은 없고 내 공간도 없이 부들부들 잠에 쫓겨 살면서도 말이다.
왜일까.
삶의 반경이 변해서이기도 하고 뭔가 나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귀퉁이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일요일마다 싸야하는 고3 도시락을 위해 메뉴를 고민하다 어젯밤 늦게까지 김밥 재료를 준비해 두고도 아침 일찍 일어나 동동거렸다. 따뜻해야만 맛있는 계란 지단 여섯 장을 얇게 부치고 금방 쿠쿠 밥통이 해놓은 따끈한 밥에 참기름과 소금, 통깨를 슬쩍 갈아 넣었지만, 김밥 아홉 줄로만 하루를 보낼 수 없었다. 빨래를 겨우 널고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집안일을 뒤로 한 채 스터디 카페로 왔고 지금 12시간이 넘었다.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물론 오후에 집으로 종종거리고 가서 쌀도 씻어 앉히고 학교에서 아이가 돌아올 시간에 타이머를 맞춰 잡곡 설정으로 취사 예약을 해 놓았다. 남편이 굽기 좋게 며칠 전 사 놓은 목살을 냉장고 눈높이에 딱 맞춰 올려두고, 아이가 좋아하는 쌈장에 파 절임 준비까지 해 놓고 다시 스카(스터디 카페)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아침에 싼 김밥 중 남은 한 줄과 바나나 하나를 점심과 저녁으로 나누어 푸드 룸에서 해결했다. 허리가 아파 복대를 차고 주변 중고등학생들에게 민폐를 끼칠까 소음방지 키 패드를 깔고 종일 이런저런 일을 하나씩 해치우며 앉아있는 나는, 나를 돌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집안 구석구석은 먼지가 쌓이고 쿰쿰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일도 나를 돌보는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사는 게 좋은가 보다.
저녁을 잘 먹고 있는지 통화하며 언제 올거냐는 고3에게 11시까지 가겠다고 했는데 지금 11시 8분이다. 송편을 들기름에 구워서 간식으로 먹으라고 했더니 고3이 들기름이 뭔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왼쪽 냉장고 바에 노란색 뚜껑이 들기름이라고 말해두었다. 오케이 오케이 했는데 송편은 잘 먹었을까? 다 모르겠고 난 내일부터 정상 등교인 고3 아침을 위해 6시에는 일어나야 하니 지금 집으로 가야 한다. 달리기도 하고 가려고 했는데 역시 온전하게 나를 돌보기란 애초에 그른 일일지도 모른다. 대신 오늘 오후 집에 갔을 때 11층까지 계단으로 갔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 왜 7층이 집인데 11층까지 걸어 올라갔을까? 운동 때문이라고 해두자.
몇 년 후에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만큼 나 자신을 돌보고 있다고!
지금은 돌봐야 하는 남자들이 넘쳐나므로, 지금은 그들도 나도 n분의 1로 돌보느라 여념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