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이대로 괜찮은가

영화 '퍼펙트데이즈' 리뷰

by 이도이

지루해서 중간에 끌 뻔했는데 다행히 중반부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왓챠피디아 상으로는 내가 본 300번째 영화다.

감독은 빔 벤더스, 독일인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일본인의 정서, 삶의 방식에 대해 외국인인 감독이 '정말 괜찮은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일상의 미학에 감탄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고민해야 한다.


히라야마(주인공)는 도쿄 화장실 청소부일을 한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단순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히라야마가 어떻게 인생을 즐기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중후반부부터, 정확히 말하면 조카의 등장 이후부터 이야기의 관점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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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를 데리러 온 주인공의 여동생은 부자다. 그것도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와, 히라야마에게 '이런 집에 사는구나' '정말 화장실 청소일을 하냐'며 비하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부자다.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하는 듯 하지만 영화는 왜 그가 청소부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초반부, 청소부일을 하는 자신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여럿 상황에서도 웃음과 평정을 잃지 않던 그가 여동생이 다녀간 후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 뒤로 현상해 온 필름사진을 정리하지도 못할 만큼 멍하고 무기력해진다. 허탈해 보이기도 무력해 보이기도 하다. 그 한 번의 방문으로 무너진 것이다.


청소부 업체에 화를 내는 장면은 그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준다. 평소보다 두 배의 일을 더 해내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단지 일이 많아서 화가 났던 건 아니고, 그만큼의 일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총량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외부로 주의를 돌리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다. 이미 무너지고 부서진 땅 위에 모래성을 매일같이 다시 쌓는 그가 견딜 수 있는 타협점이 영화 초반부부터 반복해서 보여주던 일상이었다. 다른 즐거운 이벤트가 생겼을 때에는 그토록 화내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지만 청소부 일은 달랐다. 그건 견딜 수가 없었다. 화장실 청소로 하루를 채우는 건, 숨 가쁘게 일해야만 하는 건 그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다.


다시 말해 앞서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그의 아름답고 반복적이고 완벽한 일상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슬퍼하지 않는다. 절망하지 않는다. 위로하지도 않는다. 단골 술집 사장의 전남편을 만났을 때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도 히라야마는 그림자밟기 놀이를 하자고 한다. 그게 바로 타인에게뿐 아니라 그 자신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다. 외면, 회피, 도망. 그의 하루는 그 위에 지어졌다. 그의 모든 순간은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로부터 도망가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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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하는 히라야마를 보여주며 감독은 묻는다. 이게 정말 일상을 살아가는 걸까? 히라야마는 진짜 행복할까? 그의 일상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보편적인 모습과 거리가 있다. 모든 걸 알게 된 우리는 히라야마를 더 이상 일상을 누릴 줄 아는 평화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과묵해서 진중하거나 지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 일련의 행위들마저 '아버지를 보러 가는 게 어떠냐'는 여동생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젓는 소극적 성향과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강인할 수는 없는 거라서 어떤 사람은, 또 어떤 상황에서는 나 또한 히라야마처럼 대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일 수도 있다. 이해하지만, 알지만, 그래도 감독은 마지막 히라야마의 표정으로 모든 걸 말해준다. 그것이 행복이었나? 기쁨이었나?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그런 허울 좋은 말로 책임과 능동성을 포기해 버린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 오직 살아남았다는 흔적뿐이었다. 서랍장에 넣어두고 꺼내보지는 않는 코모비레 사진처럼 말이다. 단 한 장도 예외 없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지나와서 다행이지만 결코 다시 꺼내보고 싶지는 않은 생존자의 시꺼먼 기억 같은 것.


그래서 이 영화는 일종의 경고다. 특히 일본인은 감정을 숨기는 성격으로 유명한데 그런 점을 꼬집어냈다. 한국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난 후에 다시 처음부터 보면 그 일상이 예전만큼 밝고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보기 힘들고 안타깝고 애처로울 것이다. 그건 히라야마가 도망쳤다는 걸 이제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회피하고 외면하는 건 다른 어떤 행동보다도 그 객체에 얽매이는 방법인 것이다.

히라야마는 내면의 균열을 직면하지 않는 이상 절망으로부터 영원히 쫓길 것이다. 허울뿐인 행복이라도 가졌으니 괜찮다고 위로하면서. 그러나 그건 균열이 시작됐던 과거의 잠깐의 방문으로도 무너질 만큼 허공을 닮았다. 그런 삶이다. 모든 걸 보고 듣고 느끼지만 아무것도 보고 듣고 느낄 수 없다. 그래도 완벽한 하루였으니 괜찮다고 할까? 영화 제목은 그런 의미를 담았다. 퍼펙트데이즈. 하나도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 없는데도 완벽해지려고 애쓰는 누군가의 이야기. 감히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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