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어느 봄날. 외근을 마치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하던 나는 생전 처음 걸어보는 골목에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기 고양이들에 홀린 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펫샵이라는 게 정확하게 뭔지 모르고 동물 복지에도 무지했던 나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며 작은 다리로 폴짝폴짝 뛰다가 나에게 안기자마자 내 옷을 꽉 잡고 놓지 않던 손바닥만 한 흰색 털뭉치 녀석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대로 녀석을 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열매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학교 앞에서 500원을 주고 샀던 노란 병아리를 제외하고 인간이 아닌 동물이 우리 집에 입성한 건 처음이었고, 불쌍하게도 열매는 그날 저녁 집에서 쫓겨났다. 철없던 10년 전의 나와 함께.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이 이렇게 생생한 이유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동물을 너무 좋아하고 그때보다 크게 철이 들지도 않았다. 10년 전에는 열매를 무작정 집에 데려갔다가 쫓겨났고, 지금은 길냥이를 구조했다가 집 근처에도 가지 못했으니.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다른 집도 아니고 모텔에 와 있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분명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열매를 키우면서 동물과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것. 펫샵이나 분양을 통한 강제 번식의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을 알게 됐고, 지구를 파괴하고 동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큰 주범이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던 것 같다. 동물복지단체에 매달 후원금을 기부하고, 개식용을 반대하는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에 참여했다. 쓰던 화장품을 모두 비건으로 바꾸고 1회 용기 사용을 자제하기 위해 가능하면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환경 단체에서 진행하는 리사이클링 이벤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출퇴근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에도 차를 사지 않은 이유는, 운전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차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환경에 더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때 그곳에서 열매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지금은 열매가 없는 내 삶은 상상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펫샵에 있던 다른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아이들이 모두 어떻게 태어났는지, 성묘가 되기 전에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열매를 볼 때면, 그때 그곳에 있던 다른 고양이들의 얼굴이 함께 떠올라 가슴이 저릿할 때가 많다.
아무튼 10년 전, 동물을 싫어했던 부모님에게 쫓겨난 열매와 나는 그 당시 함께 일하던 선배네 집에 일주일 간 신세를 지게 됐다. 선배네 집에도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내 사정을 듣고 흔쾌히 집에서 지내게 해 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정말 큰 은혜였다는 걸. 열매가 선배네 오빠 이불에 오줌을 싸서 오밤중에 이불 빨래를 했다는 이야기를 선배에게 전해 들었을 때는 마치 내가 남의 집 이불에 실례를 한 것처럼 미안하고 민망했다.
어떻게든 빨리 열매를 집에 데려가려고 계속 부모님을 설득했던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 후 집에 재입성하게 된 열매는 그 뒤로 다행히(?) 한 번도 쫓겨나지 않고 10년째 우리 집 막내 노릇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올해 10일 간 유럽여행을 다녀온 엄마 왈, "너네(나와 동생)는 하나도 안 보고 싶은데 열매는 보고 싶더라." 이런 게 묘생역전이라는 걸까.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엊그제처럼 생생한 기억들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들리는 기침 소리에 반사적으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깨 기침을 해대던 녀석이 기지개를 쭉 켜며 담요에서 나오려고 꼼지락대고 있었다. 일어난 김에 뭐라도 먹여야겠다 싶어서 물그릇을 가져와 앞에 두었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어 손가락에 물을 찍어 입가에 묻힌 뒤, 물그릇을 더 가까이 대자 처음으로 자기 스스로 물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목이 말랐던 건지 한참을 마시는 녀석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약을 탄 츄르는 여전히 먹지 않았지만 물이라도 먹어 다행이었다. 눈에 한 번 더 안약을 넣어 주고 눈곱과 고름을 닦아 주었다.
소파에서 내려가고 싶어 하는 녀석을 바닥에 내려 주자, 새로운 환경이 신기했는지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벽과 소파 사이의 좁은 틈을 기어 들어가려는 걸 A4 박스 뚜껑으로 막자, 뚜껑을 박박 긁으며 그 위로 올라가려고 난리였다. 굳게 막은 곳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번에는 반대편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정신없는 아깽이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열매도 요만할 때 딱 이랬었는데. 사람이 놀아주지 않아도 주변에 널려 있는 모든 게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탐색하기도 잠시,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아 힘이 없는 건지 금세 다시 자리에 쪼그려 앉는 녀석을 침대에 올려주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얼마 안 가 다시 잠이 든 녀석을 보고 그제야 나도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새벽 4시 반. 세수라도 하고 눈을 붙여야 했지만 도저히 다시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이 마치 모두 꿈같았다. 아니,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한 번, 두 번,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녀석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졌다.
그리고 정확히 3시간 뒤, 모텔 초인종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