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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Sep 12. 2024

무더위의 영향

도미노

점심 준비를 하는데  싸움 소리가 들린다. 상가 주택이 이어지며 건물과 건물이 등을 대고 길게 이어진 동네다. 건물 앞은 훤하게 멀리 치악산까지 보이지만  옆과 뒤로는 건물들이 이어지고 원룸들도 많아 어느 집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모른다.  겨울이나  에어컨을 켜는 한 여름을 제외하고는 창문을 여는 날이 많다.  창문에 블라인드를 쳐 놓아 서로 사생활은 보호되지만 누군가가 큰 소리를 치면 아마도, 그 소리는 다 들릴 거란 생각으로 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에 국수를 삶으려 물을 끓이기 시작할 즈음에 여자의 큰 소리가 들렸다. 악을 쓰듯이 부르짖는 소리의 화음으로 둔중한 남자의 소리가 들리지만 그건, 참 듣기 거북한 소리였다. 부부일까? 모른다. 원룸이 많은 지역이라 부부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부부가 아니라도 한 집에 살 수 있는 시대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부부싸움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다. 3,40 년은 되었을까? 저런 소리를 들은 게. 일반 주택에서 아파트로 옮겨가며 부부싸움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옛날 주택보다 방음이 잘 되어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내 일이 아니니 싸움 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 주택지역으로 이사 온 지도 어느덧 20년이 넘어간다. 부부싸움이라는 단어가 아직 있는 걸 보면 부부싸움은 현재진행형일 테지만 이렇게 이웃에게 소음을 안기는 부부싸움 소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다.  


신혼살림을 하던 때.  주인 옆방에 세 들어 살던 때는 이웃에 또래들이 많았다. 지금처럼 아파트가 많던 시대가 아니니 신혼살림들은 여러 세대가 사는 집에 월세나 전세를 살았다. 고마고마한 동네 아낙들이 자주 모이며 이야기 꽃을 피우던 시절이라 시시콜콜 남의 집 살림살이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술 좋아하는 남편도 많고, 바람피우는 남편도 있었고, 시댁의 지배를 힘들어하는 애기엄마도 있고, 술 먹으면 살림살이 날아가는 부부싸움을 하는 아낙도 있었다. 시시콜콜 속 상한 이야길 나누며 흉보고 웃기도 하며 서로 위로하며 마음을 풀던 시절이다.  


더 오래전에 티브이 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살았던 어린 시절, 라디오에 '재치문답'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재치박사들이 나와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는 연예인이 아니었는지 시사만화를 그리는 분도 있었다. 라디오에는 아나운서나  가수, 또는 만담 하는 사람들이 다인 줄 알았던 시대다. 지금과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재치박사들이  동요에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코너가 있었다.


"와장창 와장창 큰 일 났어요~ 옆집에서 부부싸움 일어났어요. 냄비 뚜껑 솥뚜껑 다 날아가요. 지나가는 엿장수 수지맞아요."


집에 있는 고물로 엿을 바꿔주는 엿장수가 있던 시절이니 참 오래전 이야기다.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릉. 저기 가는 저 노인 꼬부랑 노인, 어물어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이런 동요에 와장창 와장창 부부싸움을 하며 냄비 뚜껑 솥뚜껑이 날아가는 상상을 하며 듣던 그 노래가 엄청 재미있었다. 지나가던 엿장수가 정말 수지 맞겠다는 상상을 하던 어린 시절, 아주 사실적으로 느껴지며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만큼 예전에는 소란스러움 부부싸움이 많았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티브이드라마를 보다 보면, 남편에게 맞은 여자가 눈두덩이가 파랗게 멍이 들고 계란으로 그곳을 문지르며 멍을 빼던 장면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남자들이 힘으로 여자를 누르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먹고살기에 바쁜 몸과 마음이 그 억눌림을 어디서 풀지도 못하고 술 마시고, 그 울분을 또 약자에게 힘으로 누르며 손찌검을 해 대곤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가당치도 않는 소리이겠지만. 아니 어쩌면 어디에선가 여전히 억눌려 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남자와 여자가 이제는 평행선을 걸어가며 삶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걸 대부분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평화로운 게 아니라 이혼을 하는 부부가 많은 시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가 소란스러운 싸움은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은 이기적이 동물이다 보니, 부부간에도 내 생각이 먼저이고 옳다는 주장은 할 수 있다. 또는 상대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 싸울 수도 있고, 사람이라 순간의 감정에 울분을 토할 수도 있다. 살면서 사연 없는 삶이, 아픔이나 결핍이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그걸 서로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게 또 삶이지 않은가. 열정적인 부부싸움이 참으로 오래간다. 한동안 시끄럽더니 조용해진다. 우리 부부도 조용히 국수를 먹었다. 누가, 왜 싸우지? 사실은 궁금했다. 들리는 소리는 악을 쓰며 비난하는 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는 소란스러움이었다. 조용하더니 다시 시끄럽다가 조용해지더니 다시 또 무슨 말소리가 막 들린다. 오래간다.  뭔지 모르지만 잘 해결되기를 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웃 지역의 더덕축제에 갔다가  껍질을 벗기지 않은 더덕과 도라지를 사 온 게 있다. 점심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고 식탁에 앉아 도라지 껍질을 바뀌었다. 라디오가 없어 유튜브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도라지를 깠다. 음악 소리에 맞추어 흥얼거리고 박자와 선율에 따라 손이 움직인다. 노래를 들으며 도라지 껍질을 까는 일이 재미났다. 이건 일종의 노동요일까? 내 노동의 흥을 돋우기 위해, 마음의 즐거움을 위해 볼륨을 높이고 흥겨움 속에 빠져 있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아직 저 너머 누군가의 집에는 화가 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기분이 나쁘면  음악소리도 소음일 테고, 소음이 듣기 싫다고 화가 더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싸움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싸움은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소심한 마음으로 음악 소리를 줄인다. 음악 소리를 낮추고 나니, 갑자기 도라지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도라지 손질을 언제 다 하나?  지루하다. 하기 싫다. 9월이 되었는데도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운지. 열린 창문 너머로 부부싸움의 불티가 내게로 날아오는 순간이다.


불똥이 튄다.

"자기야, 라디오 하나 사 줘. 에어컨 켜고 창문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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