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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Sep 30. 2024

여행이 주는 선물

지난여름, 길고 무더운 날들이었다. 더불어서 몸이 지쳤고, 몸이 지치니 마음마저 지쳐서 보낸 날들이다. 그나마 8월은 견디며 지냈는데, 9월이 오면서 몸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병원 검진에서는 정상 범위는 벗어났어도 치료를 요하는 정도는 아니라는데, 나는 왜 이렇게 지치는 나날들이 계속되는지. 울적한 마음으로 9월을 보냈다. 9월이 끝나는 지점에서 가을이 오는 것 같다.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보지 못하고 집에서 지내는 건 싫어서 외출을 감행한다.


충북 제천에 가면 의림지라는 저수지가 있다. 옛날옛적 삼한 시대에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신라 진흥욍 때 의륵에 의해서 민들어겼다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오래된 3대 저수지 중에 하나다. 학창 시절 사회 시간에 배웠던 밀양 수산제와 김제 벽골제 그리고 제천 의림지가 그 주인공들이다. 하늘만 바라보며 자연조건에 의해 농사를 지었던 그 시절, 농업용수 관리 목적으로 만들어진 저수지였던 의림지. 그 의림지를 해마다 간다.


아침저녁으로는 산들거리는 바람이 불어와도 한낮은 아직 뜨거운 9월. 의림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전국 곳곳에 가을꽃 축제도 많고 지자체마다 이색적인 볼거리나 체험 현장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관광객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흩어져서인지, 다소 한산한 분위기다. 의림지 역시, 의림지라는 고유명사가 주는 효과가 크니 주변을 잘 가꾸어 놓고 관람객을 부른다. 너른 저수지의 오래된 소나무, 그리고 저수지를 동동 떠 다니는 오리배와 주변에 산책길이 있고 박물관과 어린이 놀이시절까지 잘 되어 있다.


의림지 둘레길을 걷다가 저수지 옆의 소나무 아래 앉았다. 오리배가 떠 다니는 저수지가 한눈에 보이고 오래된, 아마도 몇 백 살은 되었을 소나무가 늘어선 나무 그늘의 의자였다. 그냥 앉아 있었다. 흔한 말로 물~~ 멍하면서. 생각 없는 멍~ 함이 부르는 감정이 참 행복했다. 근심걱정은 바람을 따라 날아가고, 몸의 피곤함을 의자에게 넘겨주고, 윤슬이 반짝이는 잔 물결을 바라보면서 동동 떠 다니는 오리배를 바라보고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아주 가분하고 편안하다.


더불어서 오래전, 추억의 시간으로 잠시 다녀왔다. 스무 살 이전에는 다른 지방을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십 대 초반 적은 월급을 받으며 여유는 없어도 내가 번 돈으로 짧은 여행을 할 수 있을 때, 그때 의림지를 처음 왔었다. 그냥 저수지였다. 공어라고 뱃속이 훤히 보이는 작은 물고기가  의림지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른봄에는 공어를 회로 팔았다. 젓가락으로 집어 꼬랑지를 팔락이는 작은 물고기를 빨간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던 날이 생각난다. 지금처럼 유원지라기보다는 저수지였고, 식당 두어 곳이 있었다. 둑 위로 오래된 소나무들이 있었는데, 그 위엄이 조금은 무서운 기분을 느끼게 했고 뚝 아래로 물이 흐르는 어두운 절벽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의림지를 방문하면 주변으로 관광객을 부르는 무언가가 조금씩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수지 옆은 쓸쓸함이 있었는데도 친구들과 가끔 이곳을 찾았다. 그만큼 갈 곳이 부족했던 시절이다.


어느 해 겨울, 친정가족과 찾았던 의림지는 황량한 저수지였다. 저수지 옆의 공터에 움직이며 회전하는 말모양의 로데오가 있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쓸쓸한 겨울 저수지 옆에서 로데오에 흔들이는 가족들 모습에 웃음꽃을 피웠었다. 웃음꽃이 피었음에도 그날의 겨울 저수지 모습은 황량하고 쓸쓸했던 찬바람부는 저수지로 남아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농촌마을이었으니까. 지금 그 주변에는 상가지역이 있어 예쁜 카페와 식당들이 있고, 주차장과 어린이 놀이 공원이 있고,  농가 주택과 밭이 있던 마을은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의림지 위에는 솔밭 공원도 있고 작은 저수지가 또 있는데 야경이 마치 외국의 어느 성을 바라보는 것 같은 풍경을 만드는 유원지로 변했다. 주변에 둘레길도 잘 되어 있고 인공분수와 폭포, 유리전망대와 용추폭포도 있다. 봄이면 벚꽃도 예쁘게 피는 곳이다. 세월은 나만 변하지 않았다. 의림지도 아름다운 관광지로 변했다.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멍 때리는 사이, 마음은 어느새 젊은 날로 돌아가 있었다. 예쁘던 젊은 날을 지나고, 봄이면 꽃구경을 다니던 날들이 지나, 중년의 어는 날은 암 환자가 되어서 민머리를 숨기려 모자를 쓰고 앉아있던 의림지. 그런 날들이 다 지나가고 다시 의림지에 앉아있는데, 잘 견디어 오고 잘 이겨낸 그날들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서 편안해지는 마음이다. 힐링, 치유라는 단어가 떠 오른다. 의림지가 예전을 모습을 벗어나 아름다운 유원지로 변했고, 나도 변했다. 젊음은 지나갔지만 달콤한 과즙이 흐르는 과일처럼, 마음이 잘 익은 성숙한 여인이 되어 여기 의림지에 앉아 있다고 스스로 자화자찬을 해 본다.  


추억은 아름답다. 오늘도 내일은 아름다운 추억의 날로 기억될 것 같다. 길게 보면 나이 들어가니 더 건강해지기는 어렵지만, 짧게 보면 요즈음의 힘든 상황이 이제는 소멸되어 가는 느낌을 받는다. 파란 하늘 아래 소나무가 있는 풍경과 , 잔잔한 물 위에 반짝이는 윤슬과, 아무 근심 걱정 없는 듯이 물 위를 떠 다니며 오리배 속에서 부지런히 발을 굴려 운전하는 모습의 관광객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름답다.


편안하다. 아름다운 풍경이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머물 것 같은 오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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