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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Mar 06. 2022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캐서린 메이

wintering_쉬어갈 수 있는 용기

나는 겨울에서 비롯된 단절을 사랑한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던 추위가 지나는 때에, 겨울나기를 함께 했던 책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며   적어보려 한다.  책은 9월부터 3월까지,  해의 반을 '겨울' 삼고  기간 동안 느끼는 계절 및 자연의 변화와 저자 본인의 어려웠던 시간을 엮은 책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겨울'만을 주제로 정성스럽게 써낸 책을  적이 없어서 내용이 궁금했고, 마침  또한 지금 나의 계절이 '겨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는 동안에도 많은 공감이 갔다. 작년에 이은 매섭던 겨울의 날씨는 물러갔고,  마음속 겨울도 서서히 사라지며 따스한 봄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겨울은 치장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나는 겨울에서 비롯된 단절을 사랑한다. 그림자가 발끝까지 길게 드리우는, 낮게 뜬 옅은 햇빛 아래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낮 동안에도 사람들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게 되는 시간.


 가장 처음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다. 반복되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긴장 속 하루는 늘 나를 지치게 한다. 그래서 쉬는 날이면 혼자 집에 머물기를 자청하는 편이다. 계절도 좀 심하게 타는 편이라서, 환절기에는 면역력도 많이 약해지고 찬바람이 불면 잔병치례도 잦다. 그런데 나는 더운 여름이 지날 무렵 가을로 접어드는 순간의 상쾌한 공기를 사랑하는 편이다. 찬 공기가 코 끝에 들어올 때는 설레는 기분이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는 나를 안심시켜준다. 겨울 속에 파묻혀 있으면 편안하고 보호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밝은 햇살이 그립기도 하지만, 어둡고 칙칙한 겨울도 나름 매력이 있다. 바깥이 얼어붙은 만큼 내부는 한층 따스한 느낌이 든다. 긴 겨울날 동안의 단절과 고독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고 무언가를 돌보고 싶게 만든다.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은 바깥을 바라보며, 나의 작은 방 안에서 움츠리며, 나를 돌보게 되는 고요한 시간이 좋다. 겨울의 단절은 끝인 동시에 시작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개미의 나날들도 있고 베짱이의 나날들도 있다. 준비하고 모을 수 있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도움이 필요한 나날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결함은 베짱이의 나날에 대처하기에 충분한 자원을 축적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베짱이의 나날이 우리의 약점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만 찾아오는 이례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데 있다.


 개미와 베짱이. 살면서 늘 이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어떤 목표를 향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갈 때는 개미로,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쉼이 필요한 순간에는 베짱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삶은 순환의 고리가 반복적으로 연결된 용수철 모양인 것 같다. 기쁨의 순간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고통과 슬픔의 순간으로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인생.

 나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고등학교 때부터 입시-대학-취준-취업 이 모든 단계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미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항상 미래에 대한 걱정에 걱정을 더하고, 보이지 않는 끝에 절망하며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만 갔다. 그래서 늘 베짱이의 즐거운 삶을 부러워하며 그날을 꿈꾸며 준비했다. 어쩌면 나의 최종 목표는 베짱이였나보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걱정 없이 실컷 하며 살 수 있는 충만한 삶. 그런 삶을 살아보기 위해서 매일을 개미처럼 열심히 살아냈다. 이제는 속도를 조금 늦춰 여유를 부려보고 싶은 시기가 온 것 같다.


 베짱이의 삶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한 번쯤은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도 생생한 경험이 될 수 있다. 베짱이처럼 살아보고 싶은 개미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짱이가 겨울의 굶주림과 추위에 대해 알았다면, 여름내 그렇게 노래만 하며 살 수 있었을까? 죽음과 두려움을 알면서도 감수하고 노래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현재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선택한 베짱이의 배짱과 용기가 진심으로 부러워진다. 가진 게 많아질수록, 포기할 게 많아질수록 점점 자유로운 삶과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나도 언젠가는 후회 없이 배짱을 부려볼 수 있을까? 한편으로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도 과거의 내가 꿈꾸며 살고자 했던 베짱이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베짱이의 삶은 아니지만 어찌 됐건 나는 매일 변화했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한여름에 우리는 밖으로 나가 활동하기를 원하지만, 겨울에는 집 안으로 소환되어 여름 나절에 분주히 지내느라 돌보지 못했던 온갖 남은 일들을 처리하게 된다. 겨울은 우리의 책장을 정리하고, 작년에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을 읽고,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는 즐거움을 위해 좋아했던 소설을 다시 읽는 시간이다. 여름에는 정원 의자에 앉아, 혹은 해변의 방파제에 걸터앉아 탐닉하기 좋은 거창하고 떠들썩한 사상과 심심풀이용 소설이 좋다. 반면 겨울에는 등불 아래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것이 좋다. 느리고 영적인 독서, 영혼의 재정비. 겨울은 도서관을 위한 시간이다. 서가의 숨죽인 정적과 낡은 책장의 향기와 먼지. 겨울에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개념이나 상세한 역사를 조용히 탐닉하며 몇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결국, 달리 갈 곳이 없다.


 겨울은 반강제적으로 미뤄뒀던 할 일을 하게 만든다. 한여름의 강렬한 태양과 숨 막히는 습도에 대비되는 겨울의 희미한 빛과 건조한 공기는 오히려 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매서운 추위에도 오히려 겨울은 따뜻해 보인다. 푹신한 침대에 파고들게 하고, 달콤한 붕어빵에 손이 가게 하고, 연인들이 손을 잡게 만들고,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한껏 움츠리게 만들며 내면을 어루만지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쉬어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여름에 놓친 감정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다듬는 겨우살이를 잘 해내고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나면, 또 다른 아름다운 계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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