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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Mar 09. 2024

토끼인형

할아버지가 남긴 사랑

나는 어릴 때 친할아버지댁과 외할아버지댁이 가까이 있어서 주말마다 부모님을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가곤 했다. 자아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주말마다 할아버지댁에 가는 게 귀찮았고 불만도 커졌지만, 꼬맹이 때는 재밌게 놀고 왔다.


친할아버지댁과 외할아버지댁은 둘 다 단독주택이었는데,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 있었다. 친할아버지댁은 대로변에 바로 철창의 입구가 있고 옆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커다란 2층 양옥주택이었는데, 방도 문도 여러 개 있고 마당에 강아지도 키웠지만 왠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곳에 갈 때면 엄마가 주방에서 할머니가 시키는 일들을 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낀 탓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막내딸이었지만, 장남에게 시집을 와서 유일한 맏며느리가 되었다. 장손인 오빠는 친할머니가 돌보고, 나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졌다. 그래서인지 아빠의 집보다 엄마의 집이 더 푸근하고 나와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서 외할아버지댁은 직사각형의 반듯한 구조의 집터로, 작은 구멍가게가 옆에 붙어있는 골목을 대문이 바라보고 있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이 나왔다. 마당 한가운데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양 옆으로는 외할아버지가 키우는 감나무와 무화과나무, 텃밭이 있었다. 봄에는 특히 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빨간 사루비아가 일렬로 맞이해 주었는데, 내 키만한 사루비아길을 걸을 때면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그 느낌이 나에게 아련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마당 왼쪽에는 바깥화장실과 하숙방, 외할머니 서예방, 창고, 차고, 장독대가 갖추어져 있었고, 오른쪽에는 수돗가, 그리고 마침내 다락방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이 모든 것들이 꼼꼼한 외할아버지의 성격이 묻어나듯,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아기자기하게 짜여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댁은 텃밭이 계절마다 작물이 바뀌어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마치 비밀의 정원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여름에는 무화과를, 겨울에는 홍시를 따서 광에 넣어두었다가 우리가 오면 가져다주시곤 했다. 어렸을 때는 물컹한 느낌이 싫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올 때까지 드시지 않고 아껴두었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립다. 가끔씩 외할머니와 텃밭에서 딴 상추와 고추를 수돗가에 앉아서 물에 씻기도 하고, 장독대에 올라가서 항아리 안에 따뜻하게 데워진 짭짤한 된장을 찍어 먹어보는 게 참 재미있었다. 외할머니는 조용한 성품이었지만 서예가로 오래 활동을 하셨고, 늘 글씨를 쓰시면서 손주들을 예뻐해 주셨다. 예술가인 할머니 대신 자잘한 집안일은 거의 할아버지가 주로 하셨다. 초등학교 때 아파트에서 기르던 병아리가 닭이 되어가자 외할아버지댁에 맡긴 적도 있었는데, 그때 외할아버지가 닭장도 만들어서 닭을 키울 수 있게 해 주셨다. 그 닭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집 안은 양옥인데 한옥 같은 느낌이 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이 나오고, 왼편에 외할머니가 쓰시는 안방, 맞은편에 화장실과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한 계단 낮은 자그마한 부엌이 있었고, 거실 오른편에는 햇빛이 잘 드는 방이 있었는데, 마치 사랑채 같은 외할아버지가 쓰시는 방이었다. 그 방에는 엄마가 이모들과 그날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었다던 다락방이 있었고, 수많은 옛날 책들이 쌓여 있었다. 엄마는 귀여움을 받았던 막내딸이어서 외할아버지와 제일 오랫동안 지내다가 시집을 갔다. 엄마의 학구열은 외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외할아버지댁에 가면 거실에는 늘 할아버지가 읽고 있는 책이나 공부한 흔적들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최애 티브이 프로그램은 퀴즈쇼였다. 두 살 터울의 오빠는 마치 서당처럼 외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우기도 했는데, 나는 그냥 옆에서 그림 그리거나 창고에서 훌라후프를 돌리거나 하면서 놀았다. 외할아버지는 기억력이 엄청 좋고 그림도 잘 그리셔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인 토끼를 볼펜으로 휘리릭 그려주셨는데, 그게 너무 신기했다.


어느 날은 외할아버지댁에 갔을 때, 현관 앞에 새하얀 토끼인형이 자그맣게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내 앞에 장난스러운 할아버지의 표정이 나타났고, 토끼가 어떻게 들어왔지 모르는 척하셨다. 할아버지가 손녀 주려고 시장 가서 사 온 토끼인형이었다. 인형 중에 토끼인형을 제일 좋아했던 나는 인형을 껴안고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이 토끼인형을 ‘백묘’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지금 내가 그 시절 젊었던 엄마의 나이쯤 되었다. 아이를 낳았으면 그 시절 나만한 딸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엄마의 마음,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더욱 크게 느껴진다. 엄마가 외할아버지댁에 가는 걸 참 좋아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집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나서 결국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텅 빈 주차장이 되었다. 엄마의 고향과 추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고, 나의 유년기의 기억이 한순간의 꿈같다. 할아버지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되기를 바라며 근 30년 만에 상자 안에 잠들어있던 인형을 꺼내서 깨끗하게 빨았다. 다시 흰 토끼가 되었다. 오래된 인형을 껴안아본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사루비아가 넘실대고 감나무 잎이 무성하고, 할머니의 먹 냄새와 된장냄새가 배어있고, 할아버지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가득하던 곳.

그건 바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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