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세기 없는 주방 아슬아슬 그릇 테트리스
아이들과 아침 수영하고 돌아온 점심. 집사님이 나눠주신 맛밤 1 봉지와 편의점에서 사 먹은 우유 두 팩으로 아이들 허기는 달랬지만,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양배추 찌고, 달걀 볶아서 간장 맘마 해서 간단히 먹어야겠다, 하고 보니 찜기 설거지가 안 되어있다. 아침에 사과 깎아 먹은 도마와 칼도 정리가 안 되어있다. 급히 준비하고 외출 다녀온 티가 난다.
삶은 달걀, 찐 감자, 찐 양배추, 사과, 토마토, 샤인 머스캣 몇 알. 요란한 요리 없이 간단하게 먹었는데도 아침 먹고 난 설거지 거리가 쌓였다.
주부에게 요리의 시작은 재료 손질이 아니라 이 전 끼니에 먹은 식사의 설거지다. 식세기 있는 집에 살 땐 몰랐다. 식세기 없는 주방에서 살다 보니 깨달은 주부의 생존 원칙은, 한 끼 먹자마자 바로바로, 어떨 때는 먹으면서도 설거지를 중간중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밥 해 먹어야 하는데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다면, 설거지야 할 수 있지만 건조대에 있는 그릇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아서 장에 넣을 수 없다면. 그릇을 닦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닦은 그릇을 놓을 데가 없다.
설거지하다 말고 한숨을 쉰다. 수전을 잠근다. 고무장갑을 벗는다. 허리를 숙여 하부장을 열고 구석에 박혀있는 커다란 스텐 양푼을 꺼낸다. 조리대 한 구석에 올려놓는다. 다시 고무장갑을 집어든다. 물을 튼다. 설거지 재개.
이미 풀방인 원조 그릇 건조대와 임시 건조대인 양푼 건조대에 식기 테트리스를 시작한다. 냄비, 밥그릇, 국그릇, 찬기, 숟가락, 아기 젓가락, 가위... 아 아직도 남았어? 좁은 공간에 맞서 아슬아슬 진땀 흐르는 그릇 테트리스를 하다 보면, 부지런함의 필요성이 피부로 와닿는다.
요리의 시작은 재료 손질인 줄 알았는데, 설거지였다. 싱크대가 비어 있어야, 필요한 조리도구가 세척 + 건조 완료 상태여야, 막힘 없이 요리를, 밥 차리기를 시작할 수 있다.
영양사이자 셰프이자 요리 수련생이자 설거지 인력인 주부는 대단하다. 어째서 주부들은 주부 수당을 받지 않는 걸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24.9.25.wed. 1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