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28
“전 장학관님!”
선배 한 분이 20년차 중견교사인 나에게 이 말을 처음 건네던 순간, 나는 웃어넘겼다. 그저 선배 교사의 덕담이려니, 장난삼아 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시간이 흘러도 귓가에 멤돌았다. 장학관님, 교육장님...
사람은 이름을 닮아간다고들 한다. 단지 불리는 말일 뿐인데, 이름은 그 사람의 말투와 분위기, 심지어 삶의 결까지 스며든다. 닉네임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짓기보다는, 어느 순간 누군가가 불러주며 시작된다. 그리고 반복해서 불리다 보면, 문득 자신이 그 이름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부를 때, 기왕이면 좋은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그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깊은 존중이며,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따뜻한 인성 한 조각쯤은 품고 있다. 그 빛을 먼저 알아보고 불러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덕칭(德稱)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불러준 이름이 결국 나 자신에게도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표정이 달라지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진다. 결국, 내가 먼저 건넨 긍정의 언어가 되돌아와 나를 새롭게 만들어준다. 닉네임 하나로 시작된 작은 호명이, 관계를 더 따뜻하게 만들고, 나 자신을 더 선하게 만든다.
나 역시 이름을 선물처럼 받아온 사람이다. 초임 교사 시절부터 이제 퇴직을 앞둔 지금까지, 내게는 몇 가지 닉네임이 있었다. 39년의 교직생활 동안 나를 부르던 세 개의 닉네임이 있었다. “장학관님”, “교육장님” 그리고 “우리 교육장님.” 모두 직장 동료와 선배 교사들, 함께 일하던 이들이 불러준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 호칭이 참 버거웠다. 후배였던 내가, 선배님께 장학관이라니.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딘가 쑥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 고맙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를 그렇게 믿고 불러주는 그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 그 선배님께서 퇴직하셨지만, 여전히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이름이 만든 인연은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닉네임은 단순한 농담이나 덕담에 그치지 않았다. 교사 시절에는 승진도, 교육전문직도 마음에 두지 않았던 나였다. 그저 아이들과 교실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사람. 그런데 그 불림이 오래도록 이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꿈이 생기고, 방향이 열리고, 마침내 나는 그 이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3년의 교사 생활 끝에 교감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장학사로 전직하게 되었다. 마치 예고된 길처럼, 나는 그렇게 장학관이 되고, 결국 교육장이라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 모든 여정은 누군가가 불러주었던 닉네임에서 시작되었다. 농담처럼 시작된 말, 믿음 섞인 부름이 결국은 나의 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게 유난히 오래도록 남은 닉네임이 있다. 바로 ‘전박사’. 박사학위를 받은 적은 없지만,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또 어딘가 믿음 섞인 존중으로 그렇게 불러주었다. 그 이름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그리고 점점 내 마음속에 작은 자부심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전박사’라는 닉네임을 메신저 비밀번호로 사용하고 있다. 벌써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건넨 그 따뜻한 부름이, 나에 대한 기대이자 격려였음을 알기에.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다시 내 안의 가능성과 믿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비밀번호는 단순한 보안코드가 아니라, 나에게 건네진 작고 고마운 선물이다.
이제 퇴직을 앞두고 돌아보면, 나는 참 많은 이름으로 불렸고, 그 이름들이 내 삶의 방향을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좋은 이름 하나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이름이 또 다른 가능성과 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부르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주는, 작지만 깊은 힘이 된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닉네임을 불러주면, 놀랍게도 사람은 그 말처럼 변해간다. 무의식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듯, 말 한마디가 삶의 색깔을 바꾸기도 한다. 이름은 그렇게 사람을 닮게 하고, 닮아가게 만든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줄 기회가 있다면, 꼭 좋은 이름으로 불러주자. 그것이 그 사람의 가능성을 여는 열쇠가 되고, 언젠가 진짜 그 이름대로 살아가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