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통 May 20. 2023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

나의 외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인생은 의외의 연속이다. 초여름의 도래를 확실히 알아달라는 듯 갑자기 기온이 올라간 한낮 땡볕 아래서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글, 네가 썼니? “


할아버지 글. 오래전에 일기처럼 쓴 글이지만 바로 기억났다. 왜냐하면 그 글은 공개되면 안 되는 글이기 때문이다. 제천의 자랑인 박지견 시인을 가족들이 디스 하는… 특히 우리 아부지의 혹평이 따옴표 안에 워딩 그대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작가로 전향하겠다며 신나서 글을 몇 개 끄적이고, 늘 그랬듯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존재하는 수많은 호들갑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시 쓴 글들은 차마 어디 보여줄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나의 작가 전향을 지지했던 영문학과 만학도인 아버지에게 공유했고, 오늘 소환된 ’ 할아버지 글‘은 꽤 호평을 받음과 동시에 그의 우려가 묻은 글이었기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시에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울림‘이 없다고 했다며 수정을 요청했고, 나는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 사료’되며 ‘팔로워도 없는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요청을 반려했다. 그런데 나의 예상을 깨고 그 글이 엄마를 아는 누군가의 눈에 띄어버린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집안이 소란스러웠던 이유, 할아버지 탄생 백주년 행사에 그 글을 활용하고 싶다고 했다. 고르고 골라 가장 그 글을 읽지 않았으면 했던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향유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동향의 할아버지 Big Fan들의 질타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행사 주최 측에서도 글의 내용을 알면서도 그런 의사를 타진해 온 것이니 괜찮지 않겠냐고 엄마는 말했다. 그렇다. 괜찮았다. 상상치 못했던 독자들이라 해도 누군가가 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뻤다. 아버지가 등장하는 부분과 후에 밝혀진 사실과 다른 글의 내용만 수정해서 다시 보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막상 수정하려고 하니 글의 주제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고, 찰나의 작가 지망생에 불과할지라도 고집은 있었기에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하여 이렇게 박지견 시인 탄생 백주년 행사를 목전에 둔 지금 시점의 ’할아버지 글‘을 추가하고자 한다.


2004년 4월. 살아온 인생을 반으로 접으면 중간값에 가까운 시기다. 오래 전의 일임에도 비교적 많은 정보가 떠오른다. 다소 쌀쌀했던 날씨. 시간은 밤이었고 당시 나는 스무 살, 대학 입시에 실패해 수험생 신분을 1년 연장한 재수생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일 학원 안 가도 되겠다‘. 먼저 출발한 부모님과 따로 제천으로 향했다. 나의 고향. 유년시절 대부분의 추억이 머문 자리. 그리고 그 추억의 배경이나 그림자처럼, 항상 거기 계셨지만 한 번도 의식해서 생각해 본 적 없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그날이 할아버지와 나의 어떤 관계의 시작이었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스무 살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생소한 죽음 앞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무표정하게 지루한 장례식을 견뎌내고 있는 나와 대조적으로 사촌언니는 통곡을 했다. 방학은 으레 제천에서 보내던 몇몇 사촌들이 있었는데, 언니와 나는 고정 멤버였다. 늘 함께였지만 언니의 추억과 내가 본 장면들은 달랐나 보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서야 알게 된, 전혀 눈치 못 챈 일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언니를 예뻐하셨던 것 같다. 아닌가. 그 반대일까. 언니는 할아버지를 좋아했었던 것 같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린 언니를 데리고 단골 다방에 가서 현재, 2023년도에 유행하는 힙한 드립커피를 내려드셨다는 일화는 내 에피소드로 삼고 싶을 만큼 너무 탐이 났다. 나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만 생각나는데… 이미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질투했다. (방학 때마다 할아버지 방 장지문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고 사라지는 손녀를 예뻐하는 것은 누구라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 지금은 이해한다)


언니는 손주들에게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할아버지가 왜 좋았을까. 사춘기에 접어들고 사촌들은 점차 제천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언니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혼자 훌쩍 제천에 찾아갔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암에 걸리고 요양을 할 때도 할아버지 옆에서 손을 잡고 잤다고 했다. 과연 할아버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였다.


그런 손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의 시를 반복해서 필사했다고 했다. 이젠 곁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시인 박지견의 시가 좋았는지, 삼촌 생각은 알 수 없다. 아무튼 할아버지의 글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아니었다. 이 부분은 꼭 수정하고 싶다.


그리고 삼촌의 아내, 할아버지의 둘째 며느리는 재작년, 딸과 함께 찾은 제천에서 할아버지의 시비를 보러 갔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의 시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 알았다. 삼촌의 강요가 아니었다고 했다. 며느리가 자발적으로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다니…? 요즘 세상에 듣기 어려운 훈훈한 이야기였다. 외숙모는 제천 출신으로 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문제의 우리 아빠…! 막내 사위는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뒷북 관심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자신의 딸과 사위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평론가처럼 할아버지 시를 평했지만, 그 자체가 할아버지 시에 관심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할아버지의 클래식 음악 사랑은 대단하셨는데, 늘 축음기로 듣던 클래식을 현장에서 들어보시라고 모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티켓을 아빠가 어렵사리 구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제천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감상 혹은 감사 인사를 기대했던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아빠는 지금도 종종 그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할아버지 추종자 친구들을 곁에 둔 탓에 아빠도 동경하는 마음을 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장인어른께 잘 보이려던 막내 사위의 귀여운 마음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 취향을 파악해서 고가의 티켓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던 아빠는 할아버지를 좋아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다음은 그의 아내, 할아버지의 막내딸은 할아버지에 대한 비호감이 도드라지는 인물이다. 사실 할아버지는 ‘가정적이다’라는 표현의 정 반대의 성질을 가진 남성이었다. 현대의 여성인 내가 듣기엔 과히 불편한 일화도 적지 않은데 신기하게 엄마의 손위 형제들은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만이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감추지 않는… 것처럼 나는 느꼈다. 엄마는 형제들과 나이차이가 꽤 나는 막내라 MZ세대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참지 않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엄마가 할아버지 앞에서 공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묘한 거리감은 느껴졌다. 하지만 첫 번째 ’할아버지 글‘이 들통난 직후 두 번째 ’할아버지 글‘ 집필을 앞둔 나에게 할아버지 시집을 다시 읽으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할아버지 막내딸은 아버지는 미워했어도 시인 박지견은 다르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의 장녀, It’s me… 할아버지의 시는 별로라는 망언을 했는데 그 말 취소하고 싶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시집에 손을 댄 것이 그 계기라 할 수 있는데, 산문은 너무나도 취향 저격에 감동이 흘러넘쳤던 그녀의 시는 몹시도 난해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시를 읽은 적이 있었던가…? 자문해 보니 수험생 시절 해설이 첨부된 언어영역 지문의 시 외에는 자발적으로 시를 찾은 적이 거의 전무에 가까웠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시는 원래 알아듣지 못할 말이구나…! 문득 할아버지의 산문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오늘, 두 번째 ‘할아버지 글’을 쓰기에 앞서 펼쳐본 할아버지 시집 책머리에 산문으로 분류될 만한 할아버지의 글이 있었다. 시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그 머리말에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곳에는 무뚝뚝한 고집쟁이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시인 박지견이 있었다.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스스로의 글을 보며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술가가 있었다.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평생을 바쳐 시를 사랑한 할아버지를 존경한다. 아직은 시를 알지 못해 할아버지 시가 좋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대선배 작가에게 배우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시집을 다시 정독해보려 한다. 언젠가 할아버지의 시는 도 아니면 개가 아니라 전부 모예요…!라고 말씀드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은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할머니와 함께 계신 할아버지 묘에 생전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막걸리를 공양했다. 두 잔씩 따라서 한잔은 내가 마시고, 한잔은 할아버지 무덤에 뿌렸다. 난생처음, 집안 최고의 두 주당이 함께 술을 마셨다. 유독 예민하고 잠에 드는 것이 그리도 힘들었던 할아버지와 나… 가끔 이 거추장스러운 육신을 벗어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이제 해방되신 걸까. 그렇다면 더 이상 술은 찾지 않으실 수도 있겠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