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 뿐이다 -양귀자 ‘모순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역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고 난리다. 나는 이 기록이 나오기 조금 전에 시청했다.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하며 사람이 많이 죽어나간다는 말을 듣고 그다지 볼 마음이 들지 않아 미뤄왔다. 하지만 나는 ‘냄비의 나라’의 국민 아닌가.
‘이러다 온 국민이 다 본 다음에 니가 볼지도 몰라.’
친구의 말에 위기감을 느껴 연휴 중 하루를 투자하여 9회를 전부 다 봤다. 예상했던 대로 몰입감은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구멍 없이 탄탄했다. 생각보다는 잔인하지도 않았다. 그냥저냥 재미있었다. 평점을 매긴다면… 제 점수는요, 9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흥행을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한 친구는 감독이 정말 미친 것 같다(신선하다는 의미로)고 말했지만, 또 다른 친구는 너무 뻔해서 3화까지 보다 껐다고 했다. 나는 그 중간쯤에 있었다. 왕년에 일본 만화 좀 본 사람이라면 오징어 게임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영화 ‘배틀로얄’ + 만화 ‘카이지’ + 만화/드라마 ‘라이어 게임’ 이 ‘오징어 게임’으로 완성된 듯하다는 것이 나의 감상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국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나름의 특별함은 있었다. K-컬처의 위상 버프가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10선비의 나라, 조선의 숨 막히는 규제에서 해방시켜 준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앞으로 더 다양하고 획기적인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침 영어 수업에서 오징어 게임의 흥행 소식을 전하는 미국의 ABC뉴스를 다뤘다. 선생님은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면서도 영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쾌거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불행한 한국의 민낯을 너무 적나라하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뉴스에서 인터뷰한 한국계 문화 전문가는 오징어 게임에서 한국의 경제 불평등, 부동산 문제, 완벽을 강요하는 분위기 등이 강조되어 한국 내 반발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아름답고 예쁜 것만을 그리는 작품은 위선적이라 불쾌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데 수정하고 덧칠해서 보기 좋은 면만 보여주는 것이 나를 기만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따지면 재작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조커’는 미국의 비인간적인 빈민의 삶을 보여줬으므로 미국인들이 부끄러워해야 하나. 나도 ‘조커’를 재밌게 봤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에 대해 호평했던 것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은 일정 부분 불행한 것이 아닐까. 불행을 그린 작품을 보며, ‘나만 불행한 것이 아니구나.’ 하고 위로받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공감하지 못할 작품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의 불운한 주인공들을 보며 ‘저 사람들도 힘들구나.’ 또는 ‘나보다 힘든 사람도 있는데 힘내자.’며 자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들의 생각을 내 마음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 이유는 단정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둡고 축축하며 우울한 작품에 열광한다고 처음 느낀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흥행이었다. 나도 하루키의 저서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다. 삶의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느꼈다. 사실은 읽은 지 오래되어 잘 기억나지 않는다… 10년도 전에 읽은 책인데 아직도 기억나는 대사가 하나 있다. 미도리라는 여자가 했던 말이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돈이 많아서 좋은 이유는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누군가 어딘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을 때, 평소에는 부유하나 그날만 마침 가지고 있는 돈이 없는 사람은 ‘오늘 돈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로레알 가난한 사람이 ‘돈이 없다’고 말하면 동정을 유발하여 적선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듣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는 2권으로 나눠서 출간되기도 한 길고 긴 책 중에 이 대사만이 10년이 지나도록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내가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에게 신세 지기 싫었던 나는 정말로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돈이 없다’는 이유를 대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거나 ‘몸이 좋지 않다’는 다른 핑계를 생각해냈다. 공감이 있을 때 작품은 울림을 준다. 따라서 나는 ‘상실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이틀로 출간되었을 때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작품이 ‘상실의 시대’로 개명을 해서 나타나자 대박이 났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상실감’을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상실감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어둠에 공감하거나 자신과는 다른 불행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궁예해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 가까이 있는 우리 부모님만 봐도 우울한 내용의 드라마나 책은 거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부모님의 최애(가장 사랑하는) 드라마는 ‘갯마을 차차차’다. 이미 종영이 되었기에 VOD로 두 분이서 매일 2화씩 같이 시청한다. 하루는 엄마가 일정이 있었는데, 아빠가 기다리지 못하고 혼자 2화를 날름 봐버렸다고 했다. 엄마는 투덜거리며 늦은 밤까지 진도를 따라잡고, 다음 날부터 다시 아빠랑 2화씩 시청했다.
하도 난리라 나도 넷플릭스로 1화를 봤다. 신민아와 김선호가 훈훈했지만 도무지 오글거리고 집중이 되질 않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봤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1화를 시청한 후 2화 재생 버튼을 클릭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 같다. 차라리 판타지나 SF는 괜찮다. 세상에 과잉 진료 한번 권유했다고 사표 던지고 나오는 의사가 있을까. 적어도 대한민국에는 없을 것 같고(아니다, 단정하지 않겠다. 0에 한없이 수렴하는 숫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있다면 TV나 신문이나 어디든 나올 것 같다. 그만큼 희소하고 희귀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가. 얼마 전까지 의사 정원 늘린다고 단체행동하던 의사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의사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다. 진료를 하는 사람이 아닌 받는 사람으로는 그들에게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인간은 원래 자신의 이익이 최우선이다. 그들이 예과 2년, 본과 4년, 인턴과 레지던트, 의대에 합격하기까지의 입시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희생했는지도 안다. 나 같아도 나의 밥그릇과 통장에 손 대면 화난다. 그렇기에 신민아의 행동은 말이 안 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더하다. 신민아와 같은 유니콘 의사들이 득실거린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유치하고 진부했다. 차라리 동화가 더 make sense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너무나도 바라는 세상이기에 그런 동화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보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대비되어 더 불쾌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런 세상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사람은 정말 제각각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아빠는 내 글을 읽은 날, 엄마에게 뒷담화를 했다고 한다. 나의 글은 부정적이라 사람들이 다 싫어할 것이라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말한 날, ‘한강 같은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기는 한 걸까.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글 중 가장 기괴하고 우울했던 작품이 ‘채식주의자’였는데… 나는 한강 특유의 스산하고 차가운 문체가 좋다.
당신은 어둠과 빛 중 어디서 위안을 받는가. 정답은 없다. 어디서든 위안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다. 나는 주로 어둠에서 삶에 버틸 힘을 얻었다. 나의 삶의 무게가 당신의 고단한 일상에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