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봄, 유난히 찬란했던 그날의 이별
심장 박동이 없네요. 조금 이상하지만 한 주간 더 지켜보도록 하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정신이 혼미해 진채로 진료실의 검사 의자에서 내려왔다. 점점 무거워지는 두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집까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산부인과에서 집까지 걸어서 7분 남짓.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에는 잔인하게 짧은 시간이었다.
힘없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택근무 중이었던 남편의 얼굴을 보니, 더욱이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 어땠어?"
"......."
겨우 겨우 끄집어낸 말은
" 아이가 심장 박동이 없대." 였다.
사랑스러운 둘째를 꿈꾸며 우리 부부는 지난 일 년간 부단히 노력했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하고, 이전엔 쉽게 건너뛰었던 삼시 세끼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군것질도 줄이고 물도 많이 마셨다. 블로그를 뒤지고 다양한 정보를 모으며 그렇게 둘째에 대한 소망을 키웠다.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한 지 만 1년이 넘은 어느 날 규칙적이던 생리가 끊어지더니 연이어 임신테스트기에서 선명한 두 줄을 확인했다. 적어도 8주가 넘어야 아이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터라 소중한 생명을 품은 채 몇 주를 더 기다렸다. 그 시간이 돌이켜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병원 검사 의자에 앉은 후 단 몇 초만에 설레었던 달콤한 꿈은 좌절과 공포로 물들고 말았다. 난생처음 보는 초음파 사진이 오른쪽 모니터를 통해 나타났다. 보통은 반짝이는 불빛처럼 깜박이는 아이의 심장 박동이 보여야 하지만, 무심하게 텅 비어있는 동그라미 형태만 명확히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머리끝이 쭈뼛 섰다. 한 주간 더 지켜보자는 의사의 말에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마냥 온몸에 힘이 툭 하고 풀렸던 것 같다.
일주일은 어느 때보다 더디게 흘렀다.
아직 뭐라고 말하기도 힘든 시기라 힘을 내기도, 슬퍼하기도 애매했다. 대체 나는 어떤 기분이어야만 하는지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마다 잠은 죽어도 오지 않고 그 깜깜한 밤이 일곱 번, 무려 일곱 번이나 흘러야만 했다. 깊은 늪속에 빠진 발을 겨우 빼어도 다음 늪속에 더 깊숙이 처박히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악몽으로 시달리고 눈물로 지새우던 밤들이 지나고 두 번째 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여전히 심장은 없었지만 아이는 약간 자라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피검사를 해보자 하셨다.
'애초에... 처음부터 피검사했으면 됐잖아...' 의사 선생님이 너무 야속했다. 또다시 일주일의 기나긴 밤들을 보내야 한다니. 희망과 절망 그 중간 어딘가에서 무엇 하나 붙잡기가 조심스러웠다. 희망을 붙잡으려니 혹여나 뒤따라올 실망과 원망이 두려웠고, 절망을 붙잡으려니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는 둘 사이 어중간한 곳에 자리를 잡고 희망에 한 번, 절망에 한 번, 번갈아 발을 담그며 찢어지는 가슴을 겨우 붙잡아 매야만 했다.
" 피검사 결과, 호르몬 수치가 떨어지네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잖아?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이러다 피가 어디론가로 솟구쳐 나오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고 한마디만 더 들으면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넘쳐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병원에 앉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상황이 아련해지며 실제인지 허상인지 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희뿌연 연기 속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했다.
" 유산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에요. 다음번엔 좋은 소식으로 꼭 만납시다."
의사 선생님의 안쓰러운 눈동자가 내 눈을 향해 달려왔다. 그렇게 하겠노라며 참지 못한 눈물을 몇 방울 보이고는 무거운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왔다. 50 대 50의 확률이었고 결과는 절망에 기울었다. 접수대에 서서 간호사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 뒤로 배가 잔뜩 부른 산모들이 미소를 띠며 유유히 지나갔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버렸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독일의 말도 안 되는 병원 시스템이 나를 더욱 힘겹게 만들었다.
집 앞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유산 판정을 2주 만에 받았지만, 소견서를 가지고 또 다른 산부인과에 예약을 해야만 했다. 가슴이 무너지고 세상이 꺼져가는 가운데에서도 독일어 단어를 찾고 문장을 외워가면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이런 순간이 제일 비참하고 지친다.- 하지만 이미 예약이 꽉 차있는 바람에 또다시 2주를 기다려야 했다.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12주 정도 되었을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마지막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미 나의 자궁 속에는 작은 강낭콩 모양의 태아를 지나 터져 나온 피들이 한참 고여가고 있었다. 약물을 통한 자연 유산과 수술 중, 나는 수술을 택했다. 차마 내 두 눈으로 핏덩이를 볼 수가 없었을뿐더러 극심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술 동의서와 안내지를 겨우 두 손에 쥐었건만 불행히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다시 수술을 해야 할 세 번째 병원에 전화를 걸어 수술 시각을 예약해야만 했다. 진짜 속된 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부여잡고 있건만, 모든 행정적인 일처리를 당사자가 -무려 독일어로- 직접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순간 나를 분노케 만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
유난히 햇빛이 따사롭던 봄날, 나는 아이와 작별을 고했다.
첫 검진 후 약 한 달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 주어졌던 오랜 시간 동안, 내 몸속엔 들어있지만 살아있지는 않은 아이와 매일 조금씩 작별을 했다. 그래서인지 수술할 병원을 바라보며 걷는 중에 마음이 더욱 담담해져 갔다. 즉각 결과가 나오는 코로나 테스트를 하고 음성 결과를 받자마자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른 오전 8시, 남편과 딸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 마음을 다 잡고서 나무로 된 묵직한 병원 현관문을 힘껏 당겼다.
작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이내 곧 내 이름이 불렸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간호사를 따라 수술 대기실로 들어갔다. 커튼을 치고 침대 위에 고이 접힌 수술복으로 환복 한 후, 모든 소지품은 침대 옆 캐비닛에 넣고 열쇠로 문을 잠갔다. 전신마취를 할 예정이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왔지만 배가 고픈 건지 목이 마른 건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수술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아이를 잘 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어느새 나는 차가운 수술실 의자 위에 누워있었다. 주사기를 통해 한쪽 팔 혈관을 따라 뜨끈한 마취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울면 안 되는데..... 미안해요, 미안해요'를 연신 중얼거리며 눈물을 훔치다 이내 나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떠보니 회복실 침대 위였다. 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은 몽롱한 상태에서 갑자기 미친 듯이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안도의 눈물일까. 슬픔의 눈물일까. 아니면 감사의 눈물일까.
한 생명은 완전히 사라지고 다른 한 생명은 다시 눈을 떴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철철 흘러넘치는 와중에 간호사 선생님 한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수술 다 잘됐어요."
무슨 정신이었는지 나는 마취에 덜 깨 굳어있는 입을 간신히 떼어 그녀에게 독일어로 서럽게 외쳐댔다.
" 첫 번째 유산이에요. 너무 슬퍼요....... 제가 또 임신을 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오히려 호탕하게 "그럼요, 젊으시잖아요!"라고 되받아쳤다.
" 한국에서는 제 나이가 하나도 안 젊은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심 그런 생각으로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내가 누워있는 침대 쪽을 한번 더 확인하고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취하는 듯했다. 조금 전 서럽게 외쳐댔던 모습이 민망한 나머지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캐비닛을 열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무렇지 않은 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꼬박 한 달을 누워만 지냈다.
나름 임신 초기를 겪었던 몸이라 복부가 두툼해지고 몸의 모양새도 엉망이 되었다. 세상에 대한 어떤 의욕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얼른 힘을 내라'는 말은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 뿐. 아쉽게도 진짜 내 마음을 공감해줄 사람들은 곁에 없었다. 한국으로 도망치듯 가고 싶었다. 도무지 여기에서는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에 -당시에는 예방 접종도 하지 못했을 때라 더욱 불가능했다.- 한국을 갔다 오는 것 마저도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다. 부모님도 베를린에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나를 설득하셨다.
눈을 뜨고 새롭게 시작되는 날들이 너무나 힘겨웠고, 집에 있는 어린 딸아이에게도 이런 못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괴로웠지만 나는 정말 침대 밖으로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 몸안에 생명이 없음을 깨달을 때마다 오열하며 울었고, 하필 여기저기서 다른 이들의 임신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다. 나를 걱정해주는 이들의 방문이나 연락도 무척 고마웠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위로의 말들이 가시가 되어 내 가슴을 찔러대고 응원의 말들이 겨우 이어놓은 마음들을 산산조각내기도 했다.
초기 유산이라 다행이라지만, 살아있지도 않던 그 작은 세포 덩어리는 적어도 나에겐 생명의 의미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열렬히 사랑했고 뜨겁게 껴안았던 작은 생명이었다.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나의 존재마저도 하찮게 느껴지던 허망한 한 달이 그렇게 무심히도 지나가버렸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겠다.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불현듯 놀라운 마음속 울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에 뜻이 있다면, 나에게만 주어진 이 상황이 고통을 가장한 축복이라면? 그렇다면 더 이상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문득 그런 생각이 뜨겁게 가슴속을 일렁였다. 내 인생의 비극적인 사건의 의미가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딱 한 달 만에 나는 각성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의 나로 돌아가 깨끗하게 씻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후 엉망이 된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한 달여간 몸은 그저 침대 위에 누워있었지만, 기도하며 울며 내면의 부정적인 나와 처절히 싸우며 일어난 일의 의미를 돌아보고 묵상하며 보냈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생명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뼛속이 저릴 정도로 수용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봄이었던 바깥세상이 어느새 싱그러운 초여름으로 변해있었다. '봄이'라는 태명을 가졌던 그 작은 아이도, 푸른 여름 내음을 타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곁을 떠나가고 있었다.
한 달간 묵묵히 나의 힘듦을 받아내고 딸아이를 잘 돌봐주었던 남편과, 어디가 아픈지는 몰라도 '아픈 엄마'를 위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또한 나를 위해 끝까지 기도해주고 위로해준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발판 삼아 나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해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글쓰기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문득 잠 못 드는 밤이면 그렇게 반짝 찾아왔던 작은 생명이 떠오른다. 주변에 지나가는 임산부의 볼록한 배만 봐도 맘 속 깊은 곳이 따끔거리기도 하고, 누군가의 출산 소식이 들리면 부러움에 마음이 욱신거린다. 하지만 인생에 찾아오는 어려운 일도 저마다의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삶이라는 큰 그림의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은 한 조각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조각도 함부로 내다 버리거나 쓸데없이 여겨서는 안 된다.
비록 지금은 알 수없지만 내일, 먼 훗 날, 그 언젠가 한 발짝 멀찍이 떨어져 인생의 큰 그림을 바라보는 날이 되면, 그토록 가슴 아프고 눈물 나던 삶의 조각이 무엇을 그려내려 존재했는지 선명히 보게 될 것임을 믿는다. 그날에 어떠한 후회나 미련도 없기를 희망하며 나는 오늘도 선물처럼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