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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MI Oct 22. 2021

선천적 길치의 숙명

베를린의 곧게 뻗은 거리 위를 여전히 헤매고 다니는 여기, 길치 한 사람

A :  " 혹시 여기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
B :  (당황하며) "글... 쎄요?"저도 이곳이 처음이라...."



 참 보는 눈도 없군. 나에게 길을 묻다니. 혼자 피식 웃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브런치 약속을 잡고 전혀 익숙지 않은 동네에 첫 발을 내딛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램에서 갓 내려 사방팔방 펼쳐진 교차로와 핸드폰 속 구글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볼 때였다. 대 여섯 살쯤 되는 여자아이 손을 꼭 잡은 사십 대 정도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 절박하게 길을 물어댔다. 몇 번을 접었던지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구겨진 종이를 내 눈앞으로 들이밀면서 말이다. "죄송한데, 저도 이 동네가 익숙지 않아서요..." 하면 "아. 그러시군요." 하고 지나칠 줄 알았건만. 길을 좀 알려달라는 끈질긴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종이에 적힌 주소를 받아 구글맵에 입력했다. 분명 근처인데 당최 방향을 알 도리가 없었다. 핸드폰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보는데 -나도 약속시간에 늦었건만- 등 뒤로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 순간 온몸 구석구석을 타고 열감이 확 올랐다.

 어디라도 알려주지 않으면 이 두 모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불현듯 정확히 10시 방향,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넛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도넛 가게 보이시죠? 일단 저쪽으로 가셔서 쭉 걷다 보면 나올 것 같은데, 저기서 한번 더 물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환한 미소를 띠며 고맙다 인사하고는 유유히 횡단보도를 건너 내가 알려준 도넛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맞겠지?' 불안한 마음. 하지만 태평하게 오늘 처음 만난 그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약속시간에 늦었고, 마침 '징- 징-' 막 떨리기 시작한 핸드폰 화면 위로 만나기로 한 친구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선명히 떠올랐다.



잘 찾아왔네!

 약속시간에 잘도 늦어놓고 칭찬을 들었다. 그렇다. 나는 다들 알아주는 길치인 동시에 방향치이다. 분명히 예전에 -2년 혹은 3년 전쯤- 적어도 몇 번은 와본 카페였다.

하... 맞아... 그때도 그랬지. 어쩜 헤매는 방식까지 그리 똑같은 건지 모르겠다. 잘못 들어선 길을 한참 가다가 다시 몸을 돌려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이놈의 뇌는 어찌 된 영문인지 길을 잃었던 기억까지 함께 저장하여 매번 같은 방식으로 길을 한 번 잘못 들었다 제대로 돌아가는 식인 것이다. 다시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설 즘에야 '아차' 한다.

그래, 전에도 그랬었지.


 아예 처음 가보는 동네에서 길을 찾을 때는 더욱 가관이다. 구글맵을 실행하고 나면 현재 위치에서부터 목적지까지 푸른 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히는데, 그 후 내가 할 일은 그 점들이 표시된 길 위로 걸어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타고난 방향치는 서있는 위치를 기준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느 쪽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가 없다. 바라보는 방향대로 쭉 걸어야 하는 건지 뒤 돈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몇 번을 돌다 보면 결국, 어느 한쪽을 임의로 정하고 얼마만큼 걸음을 옮겨보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운이 좋으면 구글맵 거리 위에 찍혀있는 푸른 점들을 차례로 밟아나가며 쾌재를 부르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나의 발걸음은 반대 방향을 향한다.

참 희한하다.

 베를린의 대부분 거리들은 꽤나 곧게 뻗어있고, 도로명이 명시된 표지판은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있기 때문에 길 찾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당장 한국의 좁고 많은 골목길과 복잡한 거리들을 떠올려보면 베를린은 길 찾기에 있어 '매우 순한 맛'임에 분명하다. 그런데도 잘 닦인 길 위를 헤매고 다닐 때가 왕왕 있으니, 나의 길치력의 정도는 상상 그 이상이라 하겠다.



나와는 달리 길눈이 밝은 행운아들도 있다.

 베를린에서 알게 된 친구 E 도 그런 이들 중에 한 명이다. 고맙게도 그녀는 종종 나의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함께라면 어딜 가도 두렵지가 않았다. E는 구글맵을 한번 쓱 쳐다보는 것만으로 모든 길을 쉽게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종종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를 향한 존경심이 강하게 솟구쳐 오르곤 했다. 내 두 눈이 핸드폰 위의 푸른 점만 하염없이 쫓는 동안 그녀의 두 눈은 길 위의 표지판을, 예쁜 건물들을, 곁을 지나는 멋쟁이들을, 높고 푸른 하늘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경이로웠다. 그 얼마나 축복받은 능력인가!


"이쪽으로 가면 더 빠를 것 같아."

 갑자기 지도 앱에서 알려주지 않은 새로운 길로 몸을  돌리는 친구의 뒷모습에 그만 '브라보' 외칠 뻔했다. 가야  곳을 제대로 가는 것에만 급급했던 나는,   번도 목적지를 향해 '빨리'   있는 방법 내지는 지름길이 무엇일까 고민해  적이 없었다. 가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가장 빠른 길을 단번에 찾을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나는 평생 느껴보지 못할 기분이겠지. 괜히  뒤쪽으로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올라왔다.



불현듯 인생길 위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곧게 뻗은 길인지,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인지, 길이 넓은지 좁은지 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지점 위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

 가까스로 목적지를 정한 들, 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하는 나는 그저 제자리만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인생길 위에는 목적지까지 이끌어 줄 푸른 점들도,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도 없다. 그 흔한 도로명도, 기준으로 삼고 나아갈 만한 이정표도 당연히 없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길에 확신을 갖고 씩씩하게 걸어가다 별안간 나타난 큰 벽에 난감해하기도 하고, 오히려 불안감에 떨며 조심스레 옮긴 발걸음 끝에 시원하게 펼쳐진 대로를 만나기도 한다. 인생길 위에서는 모든 이가 길치인 동시에 방향치가 된다. 거창한 삶의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당장 이루고픈 목표점에 제대로 가기 위한 방향을 정하고 너무 늦지 않게 그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선천적 길치인 나에게는 퍽 심심한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부디 삶의 목적지에 '제대로' 가기 위해 길 위의 '푸른 점들'만 찾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빨리' 가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 굴리며 조급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헤매고 방황하다 길을 잃기도 우연히 길을 찾기도 하는 길치의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가던 길이 찜찜하다면? 간단하다. 되돌아가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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