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십 년처럼 살아내는 그들을 동경하며
남편 계약이 언제 까지지?
한국은 아예 안 들어오게?
언제쯤 한국 들어올 거야?
다 잘되겠지, 걱정하지 마.
서로 다른 네 가지 문장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글쎄요' 뿐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덧붙이겠는가?
감사하게도 남편은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당시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일하던 연구소에서는, 다행히 남편에게 박사 후 과정, 일명 포닥 과정(Post Doctor)의 자리를 선뜻 내주었다. 하지만 남편의 직업인 연구직이란 겉으로만 소위 있어 보일 뿐이지 실은 기약 없는 계약직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그와 별개로 나는 늘 남편이 자랑스럽지만 말이다.- 최대 2년의 계약기간. 그 2년을 다 채울 즘이면 "자기, 내년에도 계약 연장할 수 있대?"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해가 돌아왔고 전자 카드 위에 똑똑히 새겨져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체류 허가 기간이 눈에 들어왔다. "뭐... 될 거야, 이번에도."말끝을 흐리는 남편에게 나는 "응, 그래." 뿐. 말을 아꼈다.
그 나이대에 '응당 해내야 할 일' 들은 왜 이리도 끝이 없을까?
십 대, 그래 좋게 봐서 이십 대까지는 '공부'만 죽어라 열심히 하면 됐다. 이십 대 중반이 되자 '취업', 삼십 대를 바라보자 '결혼'이라는 과제가 내 눈앞에 차례로 나타났다. '결혼'이라는 산을 넘으면 뭐하나. '출산'과 '육아'의 소용돌이에 떠밀리다 보면 '안정'이라는 다소 엄한 단어에 목을 매게 된다. 안정된 직업, 안정된 밥벌이, 안정된 거주지, 안정된 통장 잔고 등 그렇게 안정, 안정하다 보니 결국 불안정한 현재 상황과 적나라하게 맞닥트렸다. 그것은 실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베를린에 살고 있는 세월 동안 나의 상황이 변함과 동시에 주변 상황도 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뜨기처럼 베를린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나와 남편은 '언제 베를린을 떠나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젊은 학생 부부'였다. 그리고 그 또래의 주변인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주로 예술분야의 학생들이 많았다지만 그때의 젊은 부부들도 우리처럼 떠돌아다니는 보헤미안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 동질감이란. 상황은 불안정했지만 마음만큼은 묘하게 안정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참 많은 것들이 바뀌어있었다. 우선은 당시 하루하루 함께 버텨나가던 유학생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 한국으로 귀국했다. 혹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로 혹은 다른 독일의 크고 작은 도시들로 떠나가고 베를린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베를린에 남아 오늘, 내일 하던 부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분야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정규직'이라는 빛나는 계급장을 달고서. 어느새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또래 가정들 중에 여전히 오늘, 내일하고 있는 가정은-예상 대로- 딱 하나, 우리 가정뿐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민 가정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2019년 말,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까지 꽤 많은 한인 가정들이 베를린으로 이민을 왔다. 그리고 그들 역시 '정규직' 계약서를 두 손에 거머쥐고 위풍당당히 입성했다.
어느새 나는 그들의 대화에 낄 틈을 잃었다.
"이번에 집 산거 축하해요. 너무 괜찮은데 잘 찾았더라."
"집 짓고 있는 건 잘 되고 있죠?"
"이번 가을 휴가는 또 어디로 가세요?"
"독일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면 윗사람 눈치 진짜 덜 보는 것 같아."
이런 류의 대화가 시작되면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이 속을 헛헛하게 만들었다. 하나같이 모터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도로 위, 나만 온 힘 다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내가 낄 대화가 아니구나 싶은 마음에 슬쩍 자리를 피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여전히 한참 어린 유학생 친구들과의 대화가 편하다. 그들의 불안, 염려, 꿈, 미래가 훨씬 내겐 현실적인 주제로 다가온다. 세월 따라 나이는 먹어가건만, 상황은 여전히 한결같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그 옛날 광고 카피라이터 같은 문장을 목구멍 뒤로 꿀떡꿀떡 삼켜냈다. '언젠가는'이라는 단어도 참 비현실 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다 이놈의 성격 탓이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짧은 세월도 아닌데, 유난히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나는 베를린이라는 장소에 마음의 뿌리를 박아 내리지 못했다. 실은 최선을 다해 아래로 아래로 뻗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너무 깊게 뿌리내렸다가 하루아침에 잘려나가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불안 때문에 그저 표토 근처만 뱅뱅 맴돌 뿐이었다.
몇몇은 이야기한다. 왜 아직도 베를린 살이 초년생처럼 그렇게 살고 있냐고. 변변한 집도, 차도 없이 혹은 여타 추가 보험 하나 없이 불편하고 불안하게 살고 있냐고. 과감히 지를 때는 지르고 일을 벌일 때는 확실히 벌여보라고. 연구직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사업을 구상해보는 건 어떠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웃으며 '그러게요' 여전히 싱거운 대답을 던지곤 한다.
우리 진짜 하루살이 인생 같다. 그렇지?
도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그런 현실에 공감하며 웃고 울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 당시 대화에 빠짐없이 등장했던 존재가 바로 하루살이, 하루 살이었다. 우리는 종종 베를린에서의 삶을 하루살이 인생에 빗대어 이야기했다.
그런데 조금 의외인 사실은 하루살이가 이름처럼 만 24시간을 살고 세상을 떠나는 곤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아성충과 성충 시기를 합한 시기가 약 일주일 내외라고 한다. 일주일이나 살고 가는 그들에게 왜 인간은 '하루'를 살아가는 애처로운 곤충이라 명명하였는가? 하루살이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없다. 약간의 상상을 더하자면 하루살이는 하루를 십 년처럼 사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약 70년의 세월처럼 살다가 유유히 먼지처럼 사라지는 삶. 알고 보면 인간의 생각에 비해 그리 서글픈 삶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타지에서의 하루살이 삶도 썩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주어진 하루를 일주일 치 또는 한 달치만큼 의미 있게 보내는 삶은 어떤가? 인간이 수십 년에 걸려 성장시키는 몸뚱이를 하루살이가 단 며칠 만에 이루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에서 언제까지 살아낼 수 있을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예전만큼 나를 괴롭히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얼마만큼 가치 있게 살아낼 수 있을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가 관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를린이 좋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 없고, 언제 어떻게 떠나게 돼도 이상할 것 전혀 없는 이 장소가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 깊숙이 들어왔다. 애증의 관계라고 해두자.
여전히 나약하고 볼품없는 마음의 뿌리가 베를린 살이의 표토만 전전하고 있음에는 딱히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다. 하지만 덕분에 오늘 주어진 이 하루가, 내일 주어질 그 하루가 무엇보다 소중한 기적이자 찬란한 보석이 되었다. 그리고 담담히 믿어본다. 단 하루를 살아도 기쁨으로 살 수 있다면, 하루살이의 인생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