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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기억의 소환

60~70년대 우리는...

by James 아저씨

벌써 찬바람이 부는 게 싫고 집에서도 온기가 좋아진다. 가을은 정말 너무 야박하게도 짧다. 이제 집안에 난방을 해야 하는 계절이 왔다. 벌써... 지금이야 대부분의 지역이 도시가스로 난방이 이뤄지고 나처럼 시골에서도 기름이나 LP가스로 난방을 하지만 예전엔 거의 대부분의 집들이 연탄으로 난방을 했다. 그 연탄 난방에 대한 기억이다.


서울 변두리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서 태어난 나는 그곳을 서른 살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난 동네는 그야말로 서울변두리 빈촌의 전형적인 동네였고 그땐 논도 있었고 밭도 있는 주소만 서울이었지 농촌과 다름없었다. 내가 태어난 그 집도 처음엔 초가지붕이었다가 나중에 스레트지붕을 얹었으며 손으로 빚어만든 흙벽돌로 벽을 쌓고 시멘트를 바른 집이었다. 뭐 대개 그 시절 그 동네 집들은 다 그런 수준의 집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 들어갈 때 즈음 동네가 바뀌기 시작했고 소위 양옥집이란 것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때 그게 고유명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지어진 양옥 주택단지를 영단주택이라 불렀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과 몇 집 빼고는 다 그런 신식집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다 재래식 그런 집에 살았기에 그 집에 대한 것에 대해 딱히 불만이나 아쉬운 것도 없었고 물론 어린 나이라 그랬고... 내가 사는데 불편함도 없었다. 그렇게 아주 어릴 땐 몰랐다가 국민학교 고학년쯤 되자 다른 아이들 집과 비교가 되면서 우리 집이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교가 되자 다른 아이들이 우리 집을 아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그 애들 집은 따뜻했다.

우리 집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ㄷ'자로 방들이 있었는데 문을 열면 그냥 밖이었다. 창호지로 만든 문에 벽은 흙벽이었으니 겨울에 단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한 겨울에 잠을 자고 나면 유리창에 성에가 끼는 건 물론 윗목에 있던 걸레가 얼어있기도 했다. 뭐 그래도 어릴 땐 내가 불편한 건 없었다. 아니 몰랐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고.... 무엇보다 살림을 하는 어른들이 불편했었을 테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가 제일 불편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입식 부엌이 아닌 부엌은 푹 파인 곳으로 부뚜막에서 불을 때서 난방을 하거나 밥을 지었겠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주 난방을 나무로 하지는 않았다. 가끔 불을 지폈던 기억은 나지만...

그때는 주로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 아랫목에 장판이 검게 타고 아랫목에 모두들 발을 대고 이불을 덮고 두런두런 둘러 있었던 기억이 어릴 때 겨울의 기억이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엔 늦게 오시는 아버님을 위해 밥그릇에 밥을 담아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두었던 기억... 그렇게 연탄이 가정의 난방과 취사를 하던 시절, 연탄은 겨울을 준비하는 서민들에겐 김장과 함께 가장 큰 월동준비였다. 연탄을 장만해 놓고 겨울을 나는 사람들은 한 겨울도 걱정 없이 날 수 있었을 것이다. 뭐 그게 아련한 추억이나 옛날엔 이랬었지... 하는 흐뭇함 보다는 커가면서 사실 불편했던 기억이 더 남는다. 그땐 연탄을 하루 몇 번씩 갈아 넣어야 했는데 방이 많던 우리 집은 그 방에 연탄을 갈아 넣는 것도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방들을 다 우리가 쓴 것은 아니었고 몇 개는 세를 주어 아마도 그 월세로 우리 집 가계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이미지에서

아무튼 그렇게 겨울에 연탄을 때던 시절... 따스한 추억이 아닌 슬프고 안타까운 기억이 늘 겨울마다 있었는데... 라디오 뉴스에 단골로 나오던 게... "일가족 연탄가스 중독 사망"...이라는 뉴스였다.

난방이 연탄이다 보니 연탄에서 일산화탄소가 나오는데 이게 잠을 자는 중 발생하면 자다가 흡입하여 그대로 죽게 되는 것이고 요샌 자살용으로 번개탄을 피워 죽지만 그땐 자살이 아니라 그냥 원치 않게 일가족이 그렇게 자다가 봉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땐 연탄가스 중독으로 고생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땐 집에서도 모두 그걸 그리 큰 대수로 여기 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모두들 몇 번씩 그런 경험이 있어선지...

의식이 몽롱하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어지러운 게 연탄가스의 중독의 증세였는데 그땐 어른들이 동치미 국물을 마시게 했는데 그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모르지만 그걸 먹였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 정신이 돌아오고 깨질 것처럼 아팠던 머리도 괜찮아지고 했는데 그땐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매해 겨울마다 그렇게 아이들이 지각을 하고 결석을 하고 나서 알려오는 사유는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어 빨리빨리 학교에 연락을 하거나 할 수 없으니 그냥 늦게 가서 사유를 말하거나 결석하고 다음날 등교하여 사유를 말하는 게 다였다. 대개 학부모가 같이 와서 담임선생님께 이야기를 해주면 그게 다였다. 가벼운 중독은 그렇게 하루 만에 회복을 하지만... 심하면 죽는 거였다. 뉴스처럼...


고등학교 때 이야기다.

이미지- 말죽거리 잔혹사

우리 반에 M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덩치는 어른 같았고 구레나룻 자국도 있고 그 앨 보면 동급생 친구라기보다는 형 같은 느낌이거나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별 말수도 없었고 그저 뒷자리에서 조용히 수학의 정석을 펴놓고 있던 애였다. 그때 보통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진쯤 되는 애들이 뒷자리에서 껄렁거리며 놀고 괜한 시비를 걸며 그네들의 힘을 자랑하듯 작거나 약해 보이는 애들을 괴롭히고 있을 때... 어느 날 그렇게 뒷자리에서 어떤 애를 괴롭히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망나니 짓을 할 때 아무도 나서서 그걸 말리거나 맞고 있는 애의 편이 되지 않을 때(나 또한 용기 없어 나서지 못하고 그냥 방관자였고) 그때 갑자기 M이 보고 있던 수학의 정석을 탁 덮더니 쓰고 있던 안경도 벗어 정석 책위에 놓더니 조용히 일어나 그야말로 번개처럼 그 괴롭힘의 주범을 향해 주먹을 날려 버렸다. 순식간이었다.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방에 나가떨어진 그 애는 일어나지 못하고 그 부하 같은 애들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며 쭈뼛대고 뒤로 물러나니 그 M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다시 안경을 쓰고 정석책을 열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또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렇게 자리에 앉아 평상으로 돌아갔다. 모두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얼어 있었다.

그리고 M은 그 후로도 별 말도 없었고 딱히 변한 것도 없었고 그 일진 같은 애들과도 부딪힘도 없이 그냥 지냈다. 그러자 갑자기 반에서 M은 우상이 되었다. 다만 그는 말수도 적고 딱히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도 않았고 게다가 그가 달라진 것도 없었다. 지금으로 하자면 MBTI에서 그 애도 대문자 I형이 아니었나 싶고... 나 또한 큰 형 같은 뒷자리 그 아이와 앞자리의 나는 가까워질 겨를이 없어 말을 나눌 일도 없었다. 그렇게 방학이 되었고 겨울이 왔다. 그해 겨울 방학이 되어 나는 종로에 있던 학원을 등록하여 학원을 다녔다. 그땐 학원들이 종로에 몰려 있을 때였고 거의 서울시내 학생들이 학원을 가려면 종로 2가쯤에 모여들 때였다. 그런데 바로 M이 나와 같은 학원의 같은 과목을 신청했고 같이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상했다. 친구가 아니라 무슨 형님과 같은 느낌에 나는 불편했고 별 말수가 없던 그 애도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아 한동안 그냥 그렇게 다니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편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둘은 친해졌다. 그 말수 없던 큰 형 같던 아이와 친해지니 나는 듬직한 백이 생긴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새 학기를 맞이했고 이번에도 M과 같은 반이 되었다. 그리고 새 학기가 되어 수업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M이 결석을 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며칠 지난 후였는지 다음날이었는지... 조회 시간에 담임은 충격적인 이야길 해주셨다.

M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을 했다고... 일가족이 다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죽었다고 했다.

그땐 그랬다. 뉴스에서도 가끔 그런 소식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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