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뉴스에서 장마가 끝났다는 멘트가 나왔다. 작년에 비해 유독 길게 느껴진 장마는 매년 요란함과 시끄러움의 강도가 더 강해지는 기분이다. 유년 시절에는 비가 오면 나름 운치도 있고 시원하기도 하고 뭔가 비 오는 날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기분이 뭐였는지는 이젠 가물가물 하지만 추적추적, 부슬부슬이라는 단어들이 그 시절의 비를 표현하는데 안성맞춤이었고, 소설과 영화에서 나오는 비 오는 날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을 흔들어 놓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 인가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비는 사라지고 폭우, 게릴라, 폭탄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가득한 존재로 남겨져 있다.
학창 시절 비는 나에게 계절 별로 나름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봄비는 추운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함을 알리는 존재였으며 여름비는 무더움에 지친 세상을 잠시 남아 식혀 주어 쉴 수 있게 해주는 쉼표 같은 존재였다. 가을비는 그 남아 생명의 한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낙엽들을 떨어뜨려 겨울을 재촉하는 것 같아 얄미우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텅 비게 만들었고 겨울비는 눈을 기다리는 나에게 헛탈감과 슬픔을 주는 존재였다.그렇게 10대, 20대 시절 나에게 많은 감수성을 불러일으켰던 비의 존재를 정신없이 보낸 30대 동안 나에게 잊혀져 있었다. 그리고 지난 봄 꽃이 만개해 있을 무렵 비가 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심코 한 마디 던졌다. "비가 오니 이제 꽃들이 다 떨어지겠네!"
40대의 반환점에 다가 선 나에게 비란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달라져 있었다. 봄비는 아직 제대로 즐기지 못한 봄 꽃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야속한 존재이고 여름비는 출퇴근길 옷을 젖게 만들어 짜증과 찝찝함을 안겨 주는 존재가 되었다. 가을비는 떨어진 낙엽을 눅눅하게 만들어 발걸음을 불쾌하게 하는 존재이고 겨울비는 빙판길을 만들어 주는 불청객 같은 존재로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20대까지 나에게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인가 나의 생활에 불편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다른 존재로 다가와 있는 것은 비 만이 아니었다. 유년 시절 비탈길 빌라 단지에 살았던 나는 겨울이 되면 빨리 눈이 와서 단지 옆 언덕길이 눈썰매장이 되기를 기다렸고 청소년 시기에는 수업 시간 창문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수업이 끝나 운동장으로 나갈 시간만을 기다렸다. 20대 시절 눈은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과 추억 만들기를 기다라게 하고 1년 내내 알 수 없는 설렘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나에게 있어 겨울에 내리는 눈은 기다림과 추억, 설렘의 존재였고 한 밤 중 주변의 소음 조차도 흡수하며 조용히 내려 소복소복 쌓이는 모습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나는 눈이 길에 쌓이는 모습을 보면 옆에 있는 지인에게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일 되면 길이 질퍽해지겠네!", "이대로 녹으면 빙판길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