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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Nov 20. 2020

영화 '미스터 노바디'

모든 선택은 기회였음을 / 에릭 사티 '짐노페디'

 

'비둘기의 고민'

 버튼을 눌러 먹이를 얻던 비둘기, 20초마다 자동으로 먹이가 나오도록 설정하니 당황한다. ‘내가 뭘 했던가?’ ‘그래 날개를 퍼덕였었지’ 이제 비둘기는 가만히 있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 힘겹도록 날개를 퍼덕인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


 2092년 세포재생 기술의 발달로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시대, 118세 나이의 ‘니모 노바디’는 이제 곧 인류 최후로 늙어 세상을 떠나는 이로 기록될 것이다. 최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니모, 그 여정은 태어나기도 이전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망각의 천사의 실수로 모든 기억을 지닌 채 태어난 니모, 기억이란 단어는 분명 과거에 지나온 것임이 분명하지만 영화에서 그의 기억은 미래조차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 태어난 그는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 아래 자라 9살이 되고 이제 인생을 좌우할 첫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빨강, 파랑, 노랑으로 표현되는 선택의 세상에서 늘 선택하지 않음으로 얻어지는 가능성을 택하던 그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 이혼하는 부모 중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니모는 이때의 선택을 시작으로 각기 다른 모습의 인생을 살게 되며, 화면에 보여지는 수만 갈래 기찻길은 인생은 선택의 연속임을 시각화한다. 그에겐 이제 어머니를 따라 기차에 오른 니모의 삶과 기차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인생이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고 이렇게 영화엔 아홉 가지 다른 삶이 있는 것이다. 수없이 갈라지던 기찻길이 어지럽듯 화면은 각 삶을 복잡하게 오가기에 혼란스러운데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 중 그의 진짜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반전, 그 힌트는 주인공은 미래에 대한 기억마저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노랑, 파랑, 빨강으로 대변되는 선택의 세상

 

 9살 소년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순간, 가족이 붕괴되고 이젠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와 살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잠시 멍하게 섰던 소년은 결심한 듯 엄마가 올라탄 기차를 쫓아 달리고 분명 사력을 다해 뛰지만 세상의 시간이 느려진 듯 흘러가는 화면과 함께 딱 그 속도만큼의 몽환적인 음악이 따라 흐르니 바로 프랑스의 괴짜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가 1888년에 작곡한 <짐노페디>(Gymnopédies). 

 세 개의 피아노 독주곡 모음인 <짐노페디>는 형식이나 자아내는 분위기에 있어 모두 큰 차이가 없지만 1번의 선율이 가장 유명하며 영화에 사용된 것은 제3번 ‘느리고 장중하게’(Len et grave)이다. 


모든 길이 옳은 길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살다간 작곡가 ‘사티’, 그는 반골 기질이 다분하여 사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음악계에 있어 아웃사이더로 통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작곡한 곡들의 농담 같은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정말 똑 부르진 데가 없는 개를 위한 변주곡>, <끝에서 두 번째 사상>, 그리고 어느 사악한 마녀의 실험실에 놓인 병에나 적혀 있을 법한 <바짝 말라버린 태아> 등이 그것이다. 제도권 음악 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두 번에 걸쳐 자퇴한 것 역시 그의 기질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러한 그의 행보는 형식에 사로잡힌 음악을 멀리 하도록 하여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음악적 철학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다. 이에 사티는 복잡하고 현학적이며 사람을 다그치듯 웅변적인 음악에 반기를 들어 음악적 핵심에 좀 더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다가가려 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그의 음악적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함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성적 독창성은 당시를 지배하던 이른바 정통이라 간주되던 양식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했던 젊은 작곡가들에게 다양한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었으며 그 영향력은 현재의 뉴 에이지 음악에까지 미친다. 하니 가진 기질로 인해 살아 외롭고 힘들던 그의 삶은 안타까워도 이로 인해 탄생한 음악적 업적은 큰 것이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가 흐르던 장면

 

 그런 그가 파리 몽마르트의 어느 한 카바레(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시절,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할 <짐노페디>를 완성한다. 듣고 있자면 시절을 방황하던 보헤미안들이 가득 모인, 담배 연기 자욱한 어느 카페에 앉아 있는 듯 신비로운 느낌이 전해지며 어두운 밤 홀로 곡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인상주의 화가가 만들어 낸 그림 속으로 들어가 거니는 듯 꿈처럼 헤매게 하니 ‘음악으로 거는 최면’인 듯 몽롱하다. 

 젊은이들이 나체로 춤을 추었다는 고대 그리스의 의식 ‘짐노페디’, 하여 어쩐지 토템적 분위기 또한 자아내는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적 춤의 향연인 <봄의 제전>이 광란이라면 사티에 의해 단순한 리듬과 멜로디로 표현된 의식은 정적이며 묘하다. 어쩌면 감독은 니모에게 닥친 첫 결정의 순간을 그의 인생을 가를 중요한 의식으로 보아 이 곡을 사용한 것이지 않을까?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

 

 영화 <미스터 노바디>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기대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충족시킨다. 비현실과 현실을 오가는 감각적인 영상이 그러하고 삶의 본질에 대해 성찰해 볼 철학적 물음 또한 던져주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아름다운 영상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음악이 있다. 소개해 보자면 수영장에서 니모가 다이빙을 하던 장면과 아버지를 돌보다 혼자만의 시간, 타자기에 앉아 소설을 쓰던 장면에서 흐르던 이탈리아의 미남 작곡가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의 대표 오페라 <노르마>(Norma) 중 가장 유명한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 사랑하는 이가 돌아오길 바라며 달에 바치는 간절한 기도라 할 이 곡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소프라노가 있으니 바로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다. ‘칼라스의 노르마냐, 노르마의 칼라스냐’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니 그녀의 목소리로 접해 본다면 곡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니모가 다른 이의 아내가 된 안나를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과 그가 써 나가는 소설 속 니모가 화성에 도착하는 순간의 장면에서 화면과 어울리던 우울한 듯 귀에 익은 선율, 바로 프랑스 작곡가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의 걸작 <파반느>(Pavane Op.50)다. 그가 남긴 멜로디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할 이 곡은 본래 관현악 소품으로 작곡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많은 연주자들에 의해 경쟁하듯 다양한 악기로 편곡, 연주되고 있는데 그 우아하고도 기품 가득한 선율은 마법처럼 우리를 17세기 궁정의 무도회로 데려다 놓는다. 



 ‘아홉 인생이나’며 어지럽던 나에게 영화가 끝나고 드는 생각은 ‘고작 아홉’이다. 우리의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며 그 결과에 의해 살아가고 있고 다른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선택의 가지들은 계속해서 뻗어 나가 그 경우의 수는 무한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그때 다르게 결정했더라면’ 하고 후회를 동반한 과거 선택의 순간을 기억하며 현재의 삶을 한탄하곤 한다. 그래! 그랬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과연 당신은 현재의 당신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이 질문에 영화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모든 길이 다 올바른 길이라 위로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로 현재에 주어진 선택마저 주저하는 이들을 다독인다.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었던 그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될지 다 알았으니 또 선택할 수 없겠지.’


선택이 아닌 '기회(CHANCE)'


에필로그


이 글을 쓰고 영화의 이미지를 찾아보다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이는 영화의 장면을 캡처한 어느 한 장의 사진 때문. 무심한 듯 흘러가는 장면과 장치들로 은밀히 영화의 주제를 내비치던 영화들을 가끔 보아왔지만 이번처럼 충격이 컸던 적은 없었다. 주인공 니모가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선택의 기로에 섰던 기차역 장면. 그리고 그들의 뒤로 보이는 역사 (驛舍)에 ‘선택’(CHOICE) 대신 쓰여진 선명한 단어 하나. 비록 고통스러운 선택일지라도 가질 수 있었던 모든 선택의 순간은 기회였음을. 

“CHANCE”




                                                   추천음반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파스칼 로제’(Pascal Roge)는 그의 1983년 음반(DECCA)을 통해 고요하고도 절제되었지만 핵심을 파고 든 해석을 보여주었으며, 이 곡에 있어 여러 번의 녹음을 남기며 곡에 대한 애정을 보여 온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 또한 작곡가의 천재성을 드러낸 뛰어난 연주(EMI, 1983)를 펼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역시 Virgin 레이블을 통해 녹음을 남기며(1990) 프랑스 작품 해석에 있어 그의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으며, 프랑스의 첼리스트 ‘오펠리 가이야르’(Ophelie Gaillard)는 음반 ‘Dreams’(신나라)를 통해 첼로의 그윽한 소리로 곡을 만나볼 수 있도록 하는데 첼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어 선물 같은 것이다.  

 1968년 제네바 콩쿨의 우승자 ‘라요스 렌체슈’(Lajos Lencses)는 음반 ‘밤의 노래(Musique de Nuit, AUDITE)’를 통해 사티의 대표작이라 할 <짐노페디>와 <그노시엔느>(Gnossiennes)를 모두 들려준다. 영롱한 하프 반주에 맞춰 흘러 나오는 그의 신비로운 오보에 소리는 음반의 제목과 어울리듯 밤의 서정을 너무도 멋지게 표현하여 이 곡이 본래 오보에를 위한 곡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훌륭한 녹음과 아름다운 자켓, 그리고 오보에란 악기와 어울릴 법한 타 프랑스 작곡가들의 명곡이 빼곡하게 채워진 것 또한 이 음반이 지닌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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