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독 일이 많은 날입니다. 기존에 해오던 일이 많기도 했지만, 또 새로운 일이 들어왔습니다.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어렵게 거절한 일도 이상하게 다시 옵니다. 팔자인가 봅니다.
오늘 회의를 하면서, 제가 기술해야 하는 파트가 늘어나는 상황이 생기면서 표정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구를 위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다시 업무라는 무덤을 더욱 깊이 파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표정 관리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말은 합리적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지금 거절하고 부정하면 분명히 나는 후회할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연구 글쓰기에 빠져듭니다. 여러 가지 연구를 수행하면 글쓰기가 어렵습니다. A 연구에 대한 글을 쓰다가 불현듯 B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나다가, 또 C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나다가, 다시 A 연구에 대한 글을 쓰다가를 반복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하나의 연구에 대한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시간에 흠뻑 빨려 들어가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토끼를 쫓아 굴로 들어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별의별 모험을 경험합니다.
아쉽게도 요즘은 일이 많아서 연구 글쓰기를 온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정해서 최대한 하나의 연구 글쓰기만 하려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지역과 사람에 대해 연구하고 이야기하며 글을 쓰는 날이 오면, 그때는 손가락이 키보드 자판 위를 날아다닐 거라고 믿습니다. 연구자가 온전하게 연구만 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포기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아내도 자신의 서재에서 열심히 일하고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이 선택한 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합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산책을 하다가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서재에서 일을 합니다. 가끔은 고3 때 독서실 다닐 때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일을 마치고 아내와 동네 헬스장에 갔습니다. PT를 하는 아내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PT는 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PT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즘 아내는 생애 첫 PT를 받고 있습니다. 걸어오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분명 서서 걸어오는데 이상하게 땅을 기어 오는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아내가 운동을 하며 건강 관리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중에 같이 여행을 많이 다니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어떨지 모르지만, 희망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진짜 우리 부부가 여행을 다니며 살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그런 날을 꿈꾸며 아내의 PT비를 벌기 위해 들어오는 강의와 연구를 최대한 거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저를 칭찬합니다. 무리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말입니다.
제가 강의하고 연구하는 일이 마치 아내의 PT 비용을 벌기 위해 하는 것 처럼 부적절한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이 아내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뭐 꼭 내가 운동을 하기 위해서 당신이 희생하는 건 아니잖아?"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맞습니다. 돈을 버는 일이 아내를 위한 일이라는 것은 충분한 동기부여를 주고 일을 마치고 나면 기분도 좋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