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관련하여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육체나 마음의 고통이 없으며 양자 모두의 고통도 없다. (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Ⅲ)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오로지 고통의 제거만이 쾌락이며, 그 이상의 쾌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쾌락의 최고 경지는 육체와 마음에 고통이 없는 상태다. 따라서 인간은 최소한의 의식주에 만족해야 한다. 그 이상의 쾌락을 추구하면 오히려 더 큰 고통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어떠한 쾌락도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쾌락들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에피쿠로스, 『단장』, VIII)
그러므로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 멀쩡한 정신으로 [쾌락을 – 인용자 주]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심지어는 성행위도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차라리 피해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성교는 인간에게 이득을 준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운이 좋다. (『향연』, VIII)
그렇다면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단순한 고통의 제거 이상의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까? 중요한 점은 쾌락에 관한 어떤 주장도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쾌락은 철저히 상대적이기에, 누군가에게 쾌를 가져다주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불쾌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경험을 통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에피쿠로스가 경계하는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유혹받는다. 우리는 때로는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길 바라고, 풍성한 식탁에서 음식을 마음껏 먹기를 원하며, 성적 욕구로부터 자극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을 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손을 뻗기 전까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제대로 검증할 수 없다.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기 위해선 고통을 제거할 뿐인 쾌락과 그 이상의 쾌락을 비교해야 하는데, 둘 다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둘을 비교하여 우위를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인간은 살면서 종종 적극적 쾌락에의 욕망에 손을 뻗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우리는 그 순간의 쾌락과 고통을 명징하게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 경험을 바탕으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자신에게 올바름을 깨달았다면, 그 순간이 안겨줬던 고통에 대한 기억이 그것을 실천하게 해 줄 동기이자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고, 적극적 쾌락을 추구하는 길이 자신에게 올바름을 깨달았다면, 그 순간이 안겨줬던 쾌락에 대한 기억이 그 길을 선택하게 해 줄 동기이자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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