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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Dec 03. 2022

내가 매일 속삭이는 사랑의 언어

문명의 멸망을 막아내는 누룽지어 예찬

까마귀, 그거 알아?

나 사실 ‘누룽지어'를 할 줄 알아. 지구상에 단 몇 명만이 구사하는 소수 언어인데, 내가 할 줄 안다니까.
누룽지어의 창제자는 아직 생존해있어. 2013년 6월 13일,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외양간에서 출생한 삽살개 혼혈견이 바로 그이야.   


난 그이가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손꼽아 기다렸어. 그러다 아이폰 4 화면으로 처음 만났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은 양수에 젖어 아직 축축했고, 엄마 나누미 님의 젖을 힘차게 쑥쑥 빨고 있었어. 끼욱끼욱 낑낑, 그 목소리가 갈매기 같기도 쥐 같기도 했어.


그래, 난 그때 벌써 사랑에 빠졌던 거지. 그 이와, 그 개와.
내 동생 미송이가 그이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어. ‘어 뭐랄까, 꼭 냄비 바닥에 눌러붙은 탄 누룽지 같아!'

누룽지가 그렇게, 우리에게 왔어.

하리타의  목소리로도 이 글을 만나보세요 -> 낭독 음원 재생하기  



누룽지어의 1단계, 기초과정부터 설명해볼까? 그건 바로 <개의 언어>.

처음에 나는 ‘개의 언어’를 배우려고  도서관으로 달려갔어. <개의  커뮤니케이션> <동물 행동학 개론서> <개의 몸짓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특히 학구적이어 보이고 두꺼운 책들을 골랐지. 난 정말 잘하고 싶었단 말이야. 


개들은 귀와 눈, 입술,  꼬리를 사용해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는 걸 배웠어. 시선 처리, 몸의 자세와 각도, 짖는 소리의 길이나 높낮이에 따라 하는 말이  다 다르다는 것도 배웠어. 나는 책 속에 삽화와 표를 확대 복사해서 우리집 냉장고에 붙였고, 누룽지는 우리 곁에서 수시로 실습  문제를 냈지. 


책상에서 참을 인자를 수천 번 그려야하고 때로 모멸감마저 안겨주는 다른 언어 공부랑은 달랐어. 개의  언어는 그냥 내게 스며들었어. “그냥 몇 번 쓱 읽었는데 다 외워지던데요.” 그런 수준이었다니깐. 내가 특출났던 걸까, 아님 개의  언어가 쉬웠던 걸까. 아무래도 좋았어. 


세상에 하나뿐인 작은 털뭉치 덕분에 나는 어느덧 기초반을 떼고 심화반으로 레벨업했어. 


2단계 심화과정부터는 드디어 <누룽지어>를 본격적으로 쓰는 거야.

누룽지어는 개의 언어에 속해 있지만 세부 규칙은 좀 더 익혀야 했어. 방언이나 은어랑 비슷하달까. 누룽지어에는 쓰기와  읽기가 존재하지 않으니 더 간결하고 쉬울 것 같지만 꼭 그렇진 않더라. 음, 미묘해, 참 미묘했어. 


누룽지어로  우리는 매일 대화해왔어. 지금 이 순간에도 쓰고 있지. 다양한 농도의 한숨들, 때로는 간절하게 타오르고 때로는 촉촉하게 지켜보는  눈빛을 서로 나눠. 랩탑을 탁 닫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이리 와서 핥아달라고, 일부러 끙끙대. 털이 덥수룩한 두 발을  콩콩 구르거나 서로의 가슴을 연결한 줄을 지그시 당기며 함께 걸어. 


사실 누룽지어를 사용하면서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어. 누룽지어와 함께 출력되곤 하는 나의 사람 언어. ‘안 돼, 하지 마.” “쓰읍, 아니야.” 이런 말들을 수시로  하면서도 하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연상시키잖아. 명령, 복종, 위계, 권위.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누룽지는 사실 엄청 강인하고 뛰어난 능력도 많이 지니고 있어. 사람 사회에 살고 있어서 작고 약하고 의존적인 것만 같지만.

만약에 이 사람 사회가 권력과 계급에 따라 서로를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곳이 아니었다면, 사람이 개에게 말하는 방식도 좀 달랐을까? 가끔 이런 고민을 해.
누룽지어가  매개하는 우리 관계의 본질은 명령과 복종이 아닌 제안과 동의, 부탁과 경청에 가깝다고 나는 믿고 싶어.


자, 마지막 3단계 전문가과정. 그 이름은 <무조건적 사랑의 언어>라고 부를게.

모든  언어가 그렇듯, 누룽지어도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것 같아. 덕분에 나는 좀 달라졌어. 내가 쓸 수 있는 다정함과 관대함이  커졌고, 전보다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어. 덜 따지고 덜 말할 줄 알게 되었어.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 없다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들이 많다는 걸, 누룽지어에서 배웠거든. 


다른 언어들은 설명과 주장의 도구일 때가 많아. 말을 하고  글을 쓰고 나면 피곤해지는게 그 증거지. 하지만 누룽지어는 그저 사랑의 표현일 때가 많아. 서로의 바람을 수용하고, 서로에게 헌신하는데 쓰여. 그리고 거기엔 치유의 힘이 있더라.

누룽지는 세상에서 매일 상처 받고 돌아오는 나를 누룽지어로 치유해.  축축한 혀로,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까딱거리는 꼬리로...무엇보다 그 열렬함으로. 나는 거기 충분히 화답하고 있을까. 내가,  그에게 충분할까...?


청년 농부와 비건들을 모아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쓴 글들을 함께 나눈 낭독회 <교차하는 시선들>에서 누룽지와 함께.

까마귀, 너에겐 사랑의 언어가 있어?

너를 무사히 살아가게 하는 사랑의 언어. 멸망을 향해가는 이 문명을 지탱해온 것은 어쩌면 이 모든 소수 언어들인지도 몰라. 약하고 희미한 듯, 그러나 뜨겁고 강인하게 서로를 아끼고  지키는 언어.

약한 듯 강인한 비인간 동물들에게서 처음으로 울려오는 언어.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랑이 있어. 그것들이  우리 곁에 늘 있었어.


오늘밤에도 나는 그이의 귓불을 살며시 붙잡고 이마에 세 번 키스할거야. 목덜미에서 꼬리까지 길게 쓸어내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이미 하지만, 전등을 끄고, 기어코 또 이 말을 하고 말겠지.  


“누룽지, 잘 자. 내일 만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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