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생존, 지금은 전략
Ep. 3
"Hola, everyone. Good morning from Bogotá!"
경쾌한 스페인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가 화면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콜롬비아 아침햇살의 온기가 목소리 속에 배어 있었다. 이어서 뉴욕의 동료가 머그잔을 들어 보이며 “Just had my first coffee”라며 웃는다. 그 옆 화면에서는 호주 시드니에서 따뜻한 실내조명 아래, 한국과는 계절이 반대인 옷차림의 동료가 약간은 나른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가상 배경이 실제 풍경을 가려도, 목소리 톤과 표정만으로도 다른 시간대의 공기가 전해졌다.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이미 오전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조용한 밤, 창밖 도심의 잔잔한 불빛을 배경으로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화면 속 까만 머리는 나 하나뿐이었다.
이 장면을 20대의 내가 봤다면 믿지 않았을 거다.
낯선 영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던 청소부였던 내가, 이제는 세계 각지의 동료들과 한 화면에서 전략을 논하고 있으니.
처음 글로벌 화상회의에 초대받았을 때, 화면에 뜨는 도시 이름들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도쿄, 뉴욕, 시드니, 싱가포르...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접속한 사람들의 화면 속 표정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내 심장은 마치 첫 면접장에 들어가기 직전처럼 뛰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첫 회의 날, 나는 내용을 잘 아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떨렸다. 단순히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소개하고, 내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달하고, 동시에 화면 너머의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게다가 실수도 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화면 공유 버튼을 잘못 눌러서 메모장을 띄운 적이 있다. 그 안에는 회의 요점뿐 아니라 내가 혼자 정리한 ‘영어로 말할 때 쓸 문장 리스트’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말 많고 쾌활한 이탈리아 동료가 웃으며 “Nice preparation!”이라고 한 덕분에 다행히 유쾌하게 넘어갔지만 그날 이후 나는 회의 전마다 ‘나만의 리허설’을 빼먹지 않았다.
이제 글로벌 회의는 나에게 무대다.
서로 다른 문화와 시간대의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한 화면에 모이는 자리.
그 안에서는 시간차·언어차·문화차가 얽히지만, 중요한 건 명확한 메시지, 분위기 읽기, 그리고 존중하는 태도다.
그래서 나는 회의 전, 이렇게 준비한다.
목적과 핵심 메시지 – 오늘 반드시 전할 ‘한 줄’을 정한다.
참석자 프로필 – 국적·직책·프로젝트 이해도를 미리 파악해 발언 강도를 조율한다.
문화 코드 – 시차·인사말·발언 스타일 등 작은 배려가 첫인상을 바꾼다.
표정과 리액션 – 표정·끄덕임·시선은 말만큼 강한 메시지를 준다.
마무리 플랜 – 질문·반론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한국 회의와 글로벌 회의는 다르다. 회의 길이, 발언 방식, 의사결정 속도, 심지어 침묵의 의미도. 한국에서는 조심스러운 침묵이 예의일 수 있지만, 글로벌 환경에선 준비 부족이나 의견 없음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나는 발언 타이밍, 간결한 메시지, 그리고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신뢰를 주는 비언어 표현까지 전략적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했다.
“회의에서 병풍처럼 웃기만 하다 끝내지 않겠다. 반드시 한마디는 하겠다.”
그렇게 쌓은 경험은 내게 이런 ‘생존·성장 팁’을 남겼다.
첫 1분 승부 – 표정과 목소리 톤이 분위기를 좌우한다. 가벼운 인사 한마디로 공기를 밝힌다.
짧고 명확하게 – 장황한 설명은 피로를 부른다. 핵심만 전달한다.
문화적 배려 – 직설형·우회형 커뮤니케이션을 구분하고 상황에 맞춘다.
시각 자료 활용 – PPT와 차트는 언어 장벽을 줄이는 공용어다.
반응 신호 – 끄덕임·웃음·짧은 코멘트로 ‘듣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마무리 재확인 – “So to recap…”으로 결론을 명확히 한다
물론 변수도 있다. 화면이 갑자기 멈추기도 하고, 가상 배경 뒤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특정 국가와 회의 때마다는 어김없이 닭이 울어대는 일도 있다. 닭을 조용히 시켜달라 할 수도 없고.. 그럴 땐 그냥 웃는다. 이런 예상 밖의 순간들이야말로 나를 더 ‘글로벌한 사람’으로 만든다.
결국 글로벌 회의의 핵심은 ‘누가 더 똑똑한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시차 속에서 어떻게 하나의 답을 함께 만들어 가느냐다. 잘 듣는 사람이 결국 회의를 이끈다는 단순한 진리를, 나는 몸으로 배웠다.
회의가 끝나고 노트북을 닫으면,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청소부였던 시절엔 하루 버티는 게 전부였고, 영어는 높디높은 벽이었다. 지금은 그 벽을 넘어 세계와 연결되어 전략을 논한다. 그 변화는 성취감만이 아니라, 내가 배웠고, 적응했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 길은 직선이 아니었다. 영어 공부, 업무 경험, 인간관계, 실수와 교훈들이 얽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때는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지금은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음 편에서는 대면·화상회의 모두에서 통하는 핵심 기술들을 풀어볼 생각이다. 사회 초년생이든 회의 베테랑이든, 회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쓸 수 있는 실질적인 ‘생존 무기’를 함께 나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