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감동, 독일의 눈물, 그리고 영국에서의 진정한 생존기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까만 밤, 도버 해협을 건너는 페리 안. 프랑스 땅을 '찍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페리 의자에 앉아,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삶을 가늠해 보려 애썼다. 가슴이 고동쳤다. 긴장? 흥분? 아니면, 순도 100%의 두려움?
그때의 나는, 계획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세상이라는 퍼즐 속에 나 자신을 던지고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 부모님에게 의지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그저 평범했던 나.
어느 날, 학교와 연계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썸머스쿨에 무심코 지원했다.
‘그냥 색다른 경험 하나 쌓는 거지’ 생각했던 그 한 달은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혼자 장을 보고 밥을 해 먹고 빨래하고, 왈츠를 배우며 수업을 듣던 그 도시의 리듬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바티칸 시국 시스티나 성당에서 마주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감수성이 폭발하던 시절,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생생함은 아마 그 시기의 나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다시 나가야겠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독일의 ‘오페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돌보며 독일어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짐을 쌌다.
호숫가 근처의 3층 집, 아빠가 손수 꾸며준 나무집이 있는 예쁘게 꾸며진 정원, 상상 속의 천사의 모습을 닮은 아이들, 주말이면 받은 급료로 기차를 타고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나날들.
겉보기엔 완벽했지만, 내 안에서는 뭔가 자꾸 갈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날, 돌보던 아이의 여섯 번째 생일 파티.
내 인생의 수레바퀴는 다시 한번 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파티에서 페이스 페인팅 담당이었다. 국제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의 친구 하나가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너, XX의 베이비시터지?”
정확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유치원생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그 순간 너무 서러웠다.
내 또래 친구들은 대학에서 강의도 듣고 공부도 하며 미래를 고민하고 있을 텐데,
나는 한창 내가 성장해야 할 시기에 말귀도 못 알아먹는 낯선 땅에서 낯선 가족의 베이비 시터 역할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객관적으로 보였다.
정원 파티는 이어졌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영어로 대화했다.
나는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말 한마디 건네주는 이 없이 홀로 묵묵히 식사를 했다.
먹고는 있었지만, 먹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외딴섬처럼 고립된 느낌. 그게 나였다.
‘ 나 이 이국만리에서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
파티가 끝나고 주인집 아저씨가 건네준 50유로의 팁은 왠지 나를 더 서럽게 만들었다.
그날 밤, 나는 그 50유로를 손에 쥐고 조용히 오래,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난 타고난 울보다. 하지만 맘껏 울고 나선 결심 한다.
그렇게 또 실컷 울고 난 뒤 부모님께 7장짜리 손 편지를 썼다.
"영어공부 하고 싶습니다. 어학연수 학비만 도와주세요. 생활비는 제가 벌어 쓰겠습니다."
그렇게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곳에 가면 뭔가 갑자기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늘 예상보다 조금 더 고단했다.
“잘 자, 푹 자, 빈대에게 물리지 말고!”
영어권에서 어린이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 장난스럽게 건네는 애정 어린 인사말이란다.
하지만 나는 진. 짜.로. 빈대에게 물리며 지냈다.
파키스탄 가족이 세놓은 저렴한 집.
침대는 빈대의 천국이었고, 다리는 매일 긁어 상처투성이.
그래도 나는 부모님께 내가 알아서 살아가 보겠다고 큰소리쳐놓은 이상, 이제는 정말 일을 구해야만 했다.
문제는 영어였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잠깐 여행 갔을 때 단번에 나를 금사빠로 만들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버스 정류장 빵가게 종업원의 근사한 영국식 악센트는 나에게 악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안 들리고 말도 안 나오는데 어학원에서는 “너 미국식 발음이야. 영국식으로 고쳐야 해”라며 나를 지적해 댔고, 식당에서 음식하나 시키기에도 주눅이 들었다.
쇼핑몰 2층의 음식점들을 돌며 “일자리 있나요?"를 반복했다.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했다.
낯가림 심하던 내가, 얼굴 붉히며 다음 가게 문을 열던 그 순간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잠깐 미쳤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했고, 방법을 몰랐기에 그렇게라도 일자리를 잡고 싶었다. 어떻게든 영국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 안쓰럽게 본 한 매장직원이 말했다.
"일하려면 학생 비자가 필요해요"
비자를 받기 위해 다음날 새벽부터 Home Office를 찾았고, 입국을 새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 바로 페리를 탔다. 프랑스를 ‘찍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던 그 밤, 나는 다짐했다.
' 내 삶은 내가 책임진다'
영국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 돈을 벌었고, 삶을 꾸렸고, 오히려 돈을 벌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무모한 용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리숙한 용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일단 해봐!
무모함이 때론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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