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이 아닌 탈피
'뭐니 뭐니 해도 부자의 가장 큰 매력은 가난 뱅이가 아무리 힘들게 발버둥 쳐가며 지키려 해도 지키기 어려운 인간성을 그들은 힘 안 들이고 수월하게 지킬 수 있다는 거였어. 넌 아 마 잘 모를 거야. 내 말뜻을 넌 가난이란 게 사람에게서 오로지 인두겁만 남겨놓고 모든 사람다움을 얼마만큼 샅샅이 짓밟는다는 걸 모를 테니까. 그거야말로 가장 큰 악덕이지. (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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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이 한 번도 포만해보지 않은 채 미리 겪은 싫증, 허기진 식상, 나는 감히 우리의 친애하는 총장님과 장엄한 위용을 갖추고 늘어 앉은 교수들의 옛날이야기 속의 구두쇠처럼 여기진 않았지만 '자유'와 진리'라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우리가 그것에 얼마나 허기진 채 식상하고 있나를 느끼고 있었다.
마치 허구한 날 굴비를 쳐다보고 입맛만 다시는 것으로 식상한 온순하고 불쌍한 구두쇠의 자식들처럼. 식상하기 위해선 행복한 시식이 있어야 한다. 만족스러운 포식을 거쳐야 한다. 그걸 거치지 않은 채 도달한 허기진 식상의 불행감을 통해 나는 우리 세대의 불행을 쓰디쓰게 음미하며, 옛날 옛적 구두 쇠의 자식들의 불행과도 만나고 있었다. ( p. 105)'
'내가 꿈꾼 자유는 결코 가출이 아니라 탈피였다. 완전한 탈피를 위해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뱀이 허물을 벗을 때, 벗어 버린 허물도 온전하고 자기의 몸도 온전하기 위해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속살도 나오기 전에 조급하게 허물을 뜯어내선 안 된다. 나는 엄마 아버지의 삶의 양식을 증오했지만 그것이 와해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거기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뱀의 허물이 아무리 온전해도 뱀에게 무용하듯이, 그것이 나에게 무용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꿈꾼. 나를 에워싼 거짓된 삶의 방법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앙갚음이었다. 나의 자립의 꿈도 이런 꿈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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