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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소녀 Sep 29. 2021

점박이 복숭아

엄마의 마음이 복숭아처럼 멍들지 않기를...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 다가오는 계절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는 사람들의 옷차림 외에도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친정엄마의 과일가게이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커다랗고 달콤한 수박이 과일 매대에 한가득 진열되었고, 가을이면 단단한 단감과 말랑말랑한 연시, 홍시, 대봉 삼총사가 등장했다. 알록달록한 과일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입안 가득 달콤함이 맴돌면서 성큼 다가온 계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매해 추석앞두고 엄마는 과일 도매시장에서 사과, 배, 포도, 복숭아 선물세트를 사 오셨다. 그중에서도 아기의 엉덩이처럼 귀엽탐스럽게 생긴 복숭아를 나는 유독 제일 좋아했다. 이렇게 커다란 복숭아가 어떻게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로 크고 먹음직스럽게 생긴 복숭아. 어린 시절 아빠가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아빠의 손에는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황도복숭아 통조림이 들려있었다. 그때는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는 날이 싫기보다는 달짝지근한 황도 통조림을 맛볼 수 있는 날이기에 은근히 기대되었다. 잘 익은 노란 황도를 포크로 콕콕 찍어서 다 먹고 나면 달짝지근한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게 참 별미였었는데... 어린 시절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여러 과일들 중에서도 유독 복숭아가 아직도 좋다. 한철 짧은 기간 동안만 맛볼 수 있고 당도가 높아 쉽게 물러서 재빨리 먹어치워야 했기에 그 맛이 늘 아쉬웠고 그래서 자꾸만 손이 가는 과일이었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바로 황도파, 백도파이다. 말랑말랑해서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노란 황도를 좋아하는 황도파. 수줍어서 살짝 상기된 볼처럼 야리야리한 연분홍색의 단단한 백도를 좋아하는 백도파. 나는 단연 황도파이다.


복숭아는 단단한 사과, 배와는 달리 과일 중에서도 유독 무르고 당도가 높아서 시장에서 물건을 사 온 순간부터 무르는 과정이 진행된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파는 게 상책이다. 빨리 안 팔린 복숭아는 처음에는 조그마한 검은 점이 생기다가 그 점은 금세 50원짜리의 크기로. 100원짜리. 500원짜리의 크기로 점점 더 커진다. 이쯤 되면 상품성이 떨어져서 손님에게 팔기가 어려워진다. 이럴 경우에만 달고 향긋한 복숭아를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복숭아조차도 아까워서 본인의 입에는 넣지 못하고 껍질을 벗기고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어린 나와 오빠의 입에 쏙쏙 넣어주셨다. 그 당시에는 어려서인지 맛있는 복숭아를 엄마에게 먹어보라도 권하지도 않고 아기 새처럼 연신 입을 벌리며 달콤한 복숭아를 받아먹곤 했다.


며칠 전에 엄마는 점이 생긴 복숭아 몇 개아이들과 함께 먹으라고 싸주셨다. 하지만 8살 난 아이가 갑자기


"할머니, 할머니는 왜 우리한테 매일 썩은 과일만 줘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아이의 말에 엄마도 당황하셨는지 얼굴이 금세 붉어지셨다. 이내 손주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시며 싱싱한 과일도 한가득 함께 싸주셨다. 아이는 아마도 할머니에게 상처를 주는 말인지도 모르고 말했을 것이다. 아이가 무심코 던진 말에 행여나 엄마의 마음이 점박이 복숭아처럼 멍들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 한편이 아렸다. 그래서 아이에게 곯은 쪽은 칼로 잘 도려내고 먹으면 괜찮다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달콤한 황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복숭아

집에 오자마자 복숭아를 깨끗이 씻고 상한 부분을 잘 도려내고 껍질을 벗겨서 예쁘게 썰었다. 접시에 내어놓으니 아이들은 언제 흠이 있던 복숭아였냐는듯이 바쁘게 포크질을 해댔다. 나도 썰어놓은 복숭아를 하나 집어 먹어보았다. 너무나 달콤해서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어느새 접시 한가득 담겨있던 복숭아가 금세 동이 났다. 그 후로도 아이들은 복숭아를 두 개 정도 더 먹었고 배가 봉긋하게 올라왔다.  


식탁에 남겨진 점박이 복숭아들을 바라보니 엄마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도 마음 같아선 손주들에게 예쁘고 좋은 것만 주고 싶으셨겠지... 하지만 예쁘고 성한 건 손님들에게 팔아야 했기에 늘 한쪽에 조금 흠이 있거나 상처가 난 과일을 주시곤 했었다. 그런 과일마저도 아까워서 본인은 드시지 않고 우리 아이들에게 주시고서도 많이 미안해하셨다.


그날 이후로는 저번처럼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이들이 없을 때 과일을 받아온다. 곯은 쪽만 잘 도려내고 예쁘게 깎아서 접시에 내어놓으면 아이들은 내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입을 벌리며 달콤한 과일을 입에 쏙쏙 넣어가며 맛있게 먹는다. 엄마도 이제는 더 이상 과일을 주시고도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는 나와 우리 아이들만 챙기지 마시고 엄마도 소중히 여기셨으면 좋겠다. 일평생 자식들에게 본인을 내어주고 또 내어주시기만  엄마. 그동안 엄마가 맛본 과일은 주로 단맛보다는 씁쓰름한 맛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과일을 맛있게 드셨다기보다는 더 상하기 전에 먹어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엄마도 좋은 게 있으면 본인을 먼저 챙기셨으면 좋겠다. 늘 좋은 건 손주와 자식들에게 양보만 해온 엄마. 본인을 좀 더 아껴주셨으면 좋겠다. 엄마가 아주 가끔이라도 예쁘고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을 맛보시기를... 쓴맛보다는 단맛에 가까운 과일을 맛보시면서 앞으로의 엄마의 인생도 달콤한 인생에 보다 가까워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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