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별소녀 Nov 11. 2021

엄마와 해보고 싶은 것들

보통 정년이란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 매달 꾸준히 통장에 찍히는 월급. 출근할 곳이 있다는 감사함. 자존감 상승 등 정년이 늦은 직업일수록 사람들에게 대체로 인기가 많다. 엄마도 한때는 정년을 정해놓고 일을 하셨던 때가 있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내가 시집을 가면. 엄마의 빚을 조금이라도 더 갚으면. 야채장사를 그만두신다고 하셨다.


 엄마는 하루라도 빨리 은퇴를 하기 위해 일 년 중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문을 여셨다. 엄마의 바람대로 삶이 순조롭게만 흘러갔다면 좋았겠지만 아버지가 엄마의 인생에 태클을 걸면서 엄마의 모든 노후계획을 망쳐놓았다. 아버지로 인해 뜻하지 않게 많은 빚이 생기게 되자 엄마의 은퇴시기는 자동으로 연장되었다. 엄마의 정년이 미뤄질수록. 드시는 약의 개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갔고 젊은이들도 힘에 부치는 야채장사를 매일 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식으로서 기뻤던 순간보다는 마음이 아렸던 순간이 점점 더 쌓여만 갔다.


엄마는 올해로 40년째 장사를 하고 계신다. 오빠와 내가 결혼하는 날을 빼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생각해보니 엄마와 해 본 게 거의 없었다. 다들 가는 여름휴가조차 엄마와 같이 가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린 시절. 여름휴가기간이 되면 아버지는 봉고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벼운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어 하셨지만 누적된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 피곤하셨던 엄마는 여행보다는 집에서 잠을 자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면서  쉬고 싶어 하셨다. 두 분이 휴가를 보내는 방식은 바둑판 위에 놓여있는  돌과 검은 돌처럼 전혀 달랐다. 그렇다 보니 아버지와 나와 단둘이서 떠난 여행은 몇 번되었지만 내가 큰 후로 엄마와 휴가다운 휴가를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장사를 오래 하시다 보니 엄마는 손가락 관절염이며 허리와 다리 통증, 심장 질환 등으로 대학병원을 한 달에 몇 차례씩 방문하셔서 약을 한 아름 받아오신다. 내년 6월이 되면 가게 계약이 만료되기 때문에 그때는 꼭 가게를 접으시겠다고 얼마 전에 나하고 약속하셨다. 이번에는 진짜 은퇴를 하실지 또 정년이 자동 연장될는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내년 6월이 다가오기 전에 엄마와 함께 해 보고 싶은 목록들을 미리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엄마와 외식하기 

돈 생각해서 집에서 힘들게 만들어 먹는 건 이제 그만하고 맛집에 가서 맛있는 거 사 먹기.


-엄마와 국내 여행 다녀오기

평생 장사를 하시다 보니 단풍구경을 한 번도 못 가보셨다. 내년 가을에는 나와 기차 타고 단풍구경 다녀오기.


-엄마와 온천 가기

나이가 드시면 뜨끈뜨끈한 데서 몸을 지지는 걸  좋아하시니 물 좋은 온천에 함께 가기.


-엄마와 목욕탕 가기

시집가 전에 엄마와 목욕탕에 가본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족히 8년은 더 된 것 같다. 엄마를 모시고 목욕탕에 가서 등도 밀어드리고 목욕 후 시원하게 바나나 우유 하나씩 입에 물고 나오기.


-엄마와 영화관 가기

엄마는 아버지와 데이트하실 때 영화관에 가보시고 결혼 후에는 한 번도 영화관에 가보셨다. 아마도 영화관에 안 가보신 게 족히 40년은 더 넘었을 듯. 나와 영화관에 같이 가서 맛있는 팝콘과 음료수도 먹으며  재미있는 코믹영화보기.


엄마와 함께 해 볼 목록을 작성하기 전에는 뭔가 거창하고 그럴듯한 리스트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적고 보니 이게 진짜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소소한 것들 투성이었다. 이렇게 소소한 것들을 왜 그동안 같이 해볼 생각조차 못했을까. 이 중 몇 가지는 같이 해보고 싶었지만 휴일 없이 일하시는 엄마이기에 늘 장사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루기만 한 것 같다.


얼마 전에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가게 그만 두면 뭐가 제일 하고 싶어?"

"엄마는 장사 안 하면 집에서 푹 늦잠도 자고 맛있는 거 많이 해 먹을 거야."

"어? 어디 여행은 안 가고?"

"어, 엄마는 어디 가는 거 싫어. 그냥 집에 있을 거야."

"엄마가 무슨 우리 동네 지킴이야? 40년 동안 장사만 하면서 가게에만 있었던 것도 억울한데 장사를 그만두면  집에만 있겠다고? 좀 더 나이 들어서 거동이 불편해지면 어딜 가고 싶어도 가질 못한데. 그러니까 장사 안 하면 나랑 여기저기 같이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단풍구경도 하고 비행기도 타보고 그동안 못해봤던 거 다 해보자."


엄마는 말이 없으셨다. 우선은 당장 무언갈 같이 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내년 6월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장사를 접으시는 게 우선일 것 같다. 장사를 그만두시고 집에서  푹 쉬시면서 체력이 회복되면 그동안 함께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쫙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해보자고 권해봐야겠다. 이번에는 제발 정년이 자동 연장되지 않기를... 이제는 모든 부담감과 삶의 무게를 훌훌 던져버리시고 엄마만 생각해서 모든 걸 과감히 내려놓고 보다 홀가분해지시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김장 배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