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폐소생술 하실 건가요?
10월 22일 목요일 오전
아이가 중환자실에 머무는 몇 개월 동안 늘 그랬듯이 아이의 상태를 알리는 레지던트의 전화가 왔다. 혈액에서 또다시 균이 발견되었다고. 그 균이 발견된 곳은 투석관을 잡아놓은 곳인데, 때문에 투석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오후에 영상의학과에 내려가서 시술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시술을 위한 이동 시 잠깐 부모 동행이 가능한데 서울에 올라올 수 있겠냐고 묻길래 외할머니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의 상태는 조금 졸려하지만 괜찮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코로나 때문에 중환자실 면회가 금지되면서 우리 아이는 4개월을 거의 혼자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10월이 되면서 장기 입원한 아이들에 한해 일주일에 한 번씩 15분의 면회가 허용되었고, 그 외에 아이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CT, MRI 등의 검사나 기타 시술을 하러 이동을 할 때뿐이었다. 병원은 서울, 우리가 사는 곳은 대구. 그래서 우리는 시술이나 검사가 있을 때마다 잠시라도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 병원으로 서둘러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9월부터 다시 회사로 복귀한 나는 그날 근무 중이었고, 그래서 지금껏 아이를 키워주고 케어해주시고 계신 친정엄마를 대신 가시기로 했다. 오전 11시 50분 KTX 표를 끊어드렸다. 오랜만에 손주 얼굴을 볼 수 있겠다며 설레하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레지던트 전화가 온 후 1시간이 좀 더 지났을까? 중환자실 번호로 전화가 왔다. 간호사가 담당교수님을 바꿔준다.
"어머님, 지금 좀 올라오셔야 할 것 같아요. 형준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졌어요. 혈압이 떨어지는데 승압제를 써도 회복이 안 돼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1시간 전에 괜찮다던 아이가 갑자기 안 좋아졌다고?'
일단 창원에서 근무하는 신랑에게 상황을 전하고 KTX를 타기 위해 급하게 역으로 갔다. 회사서 동대구역까지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친정엄마가 탄 KTX를 눈앞에서 놓치고, 창원에서 대구까지 1시간 만에 달려온 신랑을 만나 다음 KTX에 몸을 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서울로 가고 있는 친정엄마에겐 놀라실까 봐 미리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할 즈음에서야 우리도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으니 가서 만나자고 했다. 엄마는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고 했다.
오후 3시. 친정엄마보다 1시간 늦게 병원에 도착한 우리가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중환자실 복도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였다. 애 상태가 안 좋다는데, 면회도 안 시켜주고 얘기도 자세하게 안 해준다며 엄마는 엉엉 울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담당교수가 중환자실 가족상담실로 내려왔다.
"오전 7시쯤 회진할 때는 상태가 괜찮았는데 몇 시간 사이에 갑자기 안 좋아졌어요. 아무래도 새로 발견된 혈액 내 균 때문에 패혈증의 승패가 좋지 않은 쪽으로 기운 것 같습니다. 필터를 써서 혈액 내 균을 걸러내는 혈액관류요법을 다시 해 보죠"
2주 전에도 혈액 내 음성그람균이 발견되어 투석기에 필터를 장착해 혈액 내 균을 걸러내는 혈액관류요법을 한 적이 있다. 이 시술은 전액 비급여로 한 번 할 때 1,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 충분히 부담되는 금액이었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 비용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야 했기에... 그렇게 2주 전에 혈액관류요법을 하고 며칠 뒤 균이 사라졌었는데, 이번에 또다시 균이 발견되었고 2번째 혈액관류요법을 하게 된 것이다.
친정엄마와 나, 그리고 신랑... 세 명은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 눈물만 흘리며 정신 나간 사람들 마냥 중환자실 옆 가족상담실에 앉아있었다. 저녁 8시, 담당교수가 다시 가족상담실에 왔다. 이번엔 혈액관류요법이 효과가 없는 것 같다 했다. 그리곤 승압제를 최대 용량으로 투여하고 있음에도 혈압이 정상치까지 오르지 않는다고... 이대로라면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전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이 사람 지금 뭐라는 거야?'
의사한테 소리도 지르고 원망하고 화도 낼 법도 한데, 그냥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믿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처음 마주하는 절망의 순간이 그냥 꿈인 것만 같았다.
한 사람씩 아이를 보러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상태가 안 좋아진 오전부터 재우기 시작했기에 의식이 없었다. 병원에 있던 5개월 동안 계속된 금식에 20kg대로 뼈밖에 없었던 우리 아이는 다량의 수액과 항생제 등이 들어가서인지 얼굴은 물론 온몸이 터질 것처럼 퉁퉁 부은 너무나도 낯선 모습이었다.
'준아~ 엄마 왔어. 엄마 왔는데 왜 이러고 있어~ 얼른 일어나서 엄마 좀 봐봐. 응?'
잠깐의 면회를 끝내고 다시 가족상담실로 온 우리에게 레지던트가 동의서 몇 장을 건네며 말한다. 장례식은 어디서 하실 거냐고. 우리 집이 대구라서 묻는 것 같았다. '우리 아이는 아직 살아있는데... 왜 장례식 얘기를 하지?' 장례식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를 듣는 순간 '이제 더 좋아질 수는 없는 건가. 정말 마지막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묻는다. 마지막 순간에 심박동수가 떨어지면, 심폐소생술을 하실 거냐고.
'심폐소생술? 당연히 하는 거 아냐? 그걸 우리가 선택해야 해?'
심폐소생술을 하게 되면 그 과정 중에 갈비뼈도 다 부러지고, 형준이 같은 경우는 여러 카테터들이 많이 달려있어 그곳들로, 아물지 않은 상처들로, 그리고 입과 코로... 피가 다 뿜어져 나올 수도 있다고... 당연히 해야 하는 심폐소생술이지만, 부모님이 거부하실 수 있다고 했다. 아이가 더 힘들어질 수 있고, 부모님들도 보기 힘들 거라고 했다.
준이 아빠는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다시 물었다.
'자기 생각은 어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결정을 고민할 시간도 얼마 없는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충분히 더 살 수 있는 아이를 내가 심폐소생술을 거부해서 죽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근데 심폐소생술 해서 지금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해. 몸 밖으로 피가 쏟아져 나오고 뼈가 부러지고 배 안에 피가 가득 고이고... 지금도 충분히 힘들었을 텐데 우리 준이 더 힘들어지면 어떻게 해...'
"선생님, 심장만 다시 뛰게 하면 우리 준이 괜찮아질 수 있어요?"
의미가 없다 한다. 다른 큰 문제가 없다가 심장만 멈추는 거라면, 심폐소생술로 살려놓고 치료하는 게 맞지만, 우리 준이는... 애만 힘들어질 거라고 했다. 잔인하다. 의사라는 것들이, 사람 살리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는 그들이 부모에게 아이의 생명을 연장시킬 건지 말지를 직접 결정하라 한다.
"자기야, 난... 심폐소생술 안 했으면 좋겠어. 우리 준이, 이제 더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너무 많이 힘들었잖아. 오늘 이 결정이 내가 살아가는 내내 후회할 결정일지 모르지만... 안 했으면 좋겠어"
아이에게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라고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가 그렇게 아이의 삶의 길이를 멋대로 결정해 버렸다. 엄마라는 사람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삶을 연장시킬 유일한 기회를 스스로 내쳐버린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