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배추를 절이고 다시마와 황태머리를 삶아 육수를 내었다. 참쌀풀로 풀을 쑤고 무를 닦아서 씻어 놓았다. 속을 만들고 깍두기도 담을 것이다. 올해는 김장을 설렁설렁 담기로 했다.
어차피 혼자 하는 김장, 내 맘대로다. 작년까지만 해도 30 포기를 담았는데 올해는 확 줄여서 15 포기만 담기로 했다. 아이들이 크니 김치를 먹는 양이 많이 줄었다. 이제 김치는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모르겠다, 말은 이렇게 해놓고 김치를 담가놓으면 또 동생에게 택배로 부칠지도 모른다. 어차피 혼자 하는 김장, 마음 가는 데로 하는 것이다. 베란다에서 뒤척거리며 배추 절이는 게 힘들어서 이번에는 배추 10 포기와 깍두기만 담고 며칠 후 알타리와 배추 5 포기를 또 담글 생각이다. 마늘은 일주일 전부터 까놓았는데도 하루 종일 김장재료 준비하다가 날이 저물었다.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로 저녁상을 차리고 나니 대파와 생강, 갓을 빼먹은 생각이 났다.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어 투명 비닐우산을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저녁을 먹은 가족들은 각자의 방에 들어앉아 있다. 거실의 불을 껐다. 아무도 없는 집 마냥 새까매졌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우산 위에 얹어지고 빗물이 옷을 적셨다. 지금 내리는 진눈깨비는 눈이 될지, 비가 될지, 그도 아니면 이대로 그칠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지금을 적시고 맞으며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서 야채가게로 갔다. 마트는 야채가 비싸다. 야채 가게에서 대파와 생강을 샀다. 갓을 사려는데 없다고 한다. 다시 마트를 가야 하나, 미처 장갑을 챙기지 못한 손이 시려 야채가게 옆에 있는 무인카페를 흘금거리니 아저씨들이 점령하여 만석이었다.
길 아래로 걸어 내려와 카페로 들어섰다,
대파 이파리가 삐죽 솟아 나온 장바구니를 의자에 올려두고 따뜻한 녹차가 든 종이컵을 찬 두 손으로 감 샀다. 한 김이 고요하게 빠져나간다. 장바구니에 넣어 온 시집을 조용히 펼치고, 녹차를 한 모금 넘겼다. 허연 시인의 시집 ' 내가 원하는 천사'에서 ' 삽화'라는 제목의 시의 한 구절을 접어 마음에 넣는다. '오늘도 뭔가 포기하지 않는 새들만 비를 맞는다.' 하루 종일 뒤척인 배추는 얌전히 절여지고 있겠지. 마트에서 갓을 사고 맥주도 한 캔 사야겠다. 집으로 돌아가면 생새우를 갈고 무채를 치고 맥주 한잔하고 쉬듯이 잠들 것이다.
큰딸은 컸다고 요즘 내편을 든다.
"자기들끼리만 조끼 사 입고!"
엊그제 만난 언니와 동생이 같은 계열의 조끼를 입고 나와, 시장에서 싸게 샀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딸이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 한마디 얹었다." 엄마 것도 사다 주면 정 있어 보이고 좋잖아!"다시, 생각해 보니 만일 사다 줬더라면 아마도 잘 입었을 것이다. 제법 따뜻해 보이고 귀여웠다.
언니와 동생은 버스를 타고 떠나고 딸과 마트로 가는데. 카페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아파트를 새로 분양받아 이사를 갔거나, 회사를 다니게 되어 얼굴을 보기 힘들어진 동네 지인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덥석 찬 손을 내밀어 인사를 했다. "잘 지냈지? 애들도 잘 있고?"
" 응, 언니도 잘 지냈지?"
결혼을 늦게 한 나는 동네 지인들에게 대부분 언니다. 십 년을 넘게 지낸 동네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코로나 시기에 이사한 지인들에게 휴지 세트를 보내고, 평일에는 일하니 주말에 시간 될 때 만나자 연락을 했으나, 하필이면 주말마다 약속이 있다는 그녀들이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친해졌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멀어졌다.
멀어질 때가 되어 멀어진 것이겠지.
그렇게 상실의 시간을 보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였으나, 그들이 묻지 않으니 나도 묻지 않았다. 같은 동네 살면서도, 한 오 년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너도 이사 간 줄 알았어"내가 말했다."어, 언니 나 일하느라 바빠서 이 언니도,
주말에만 만났어, 그래서 언니도 못 만났지"
"나 주말에도 시간 돼!"내가 말했다.
"하하, 그래 알았어"그녀가 말했다.
다른 지인은 딸의 손을 잡고 "아가씨가 다 됐네! 아니, 아가씨지!"라고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다고 인사를 나누고 카페를 나왔다. 사실. 몇 년 전이었다면 못 본 척하고, 고개를 외로꼬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반가운 마음이 앞서, 손을 먼저 잡았다. 헤어지면서도 또 만나자는 겉치레를 나누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글쓰기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글을 쓰고, 글로 만나는 사이가 있어서, 무엇보다 나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 이제 부자 됐구나.
"얌체같이 지들끼리만 만나고! 뭐 주말에만 만나야 돼서 못 만나? 말이야 방구야!" 딸이 말했다.
"원래 둘이 더 친해" 내가 말했다.
"그래도 얄밉잖아" 딸이 말했다.
딸이 귀여웠다.
어차피, 혼자 하는 김장.
나를 위해 작은 수고를 하는 사람, 나를 위해 화를 대신 내주는 내 작은 천사들, 그런 사람과 버무려지며 오롯한 나를 데리고 다정하게 익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