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 피아노 소리를 덮어 버릴 듯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진다. 줄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빨간 고무장갑을 손에 딱 맞게 착 끼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은 시지프스의 바위와 같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적었다. 여정 속에서 삶은 충분히 행복하고 가치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피아노 연주자 임 윤찬은 인터뷰에서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는데, 숨겨진 음악을 음악가들이 꺼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상을 해보았다. 나무들이 음표들을 지그시 눌러 담고 서 있는 모습을, 풀잎을 '톡' 건드리면 음표들이 통통 틔어 오르는 마법 같은 광경을.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듣는 피아노 연주는,
등뒤로 짊어진 것들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빨래를 널면서 보이는, 창밖의 연시처럼 뭉근한 햇살 한 줌으로도 충분히 환상적인 날을 만들어 준다.
고등학교 시절 한때 푹 빠져서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는 환상의 극치였다. 호화로운 유람선에서 해군 장교와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은 사랑에 빠지고 갑판 위에서 난간에 기대 키스를 했다. 사랑은 위태롭고 낭만적이었다. 부드러운 지중해의 바람이 탐스러운 여인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드레스 자락을 흩날리는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우아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단 한 번도 그녀들처럼 되지는 못할 테지만 상상 속에서는 맘껏 매력적인 주인공이 되어 보았다. 하이틴 로맨스와 더불어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순정만화를 좋아했다. 혁명의 대의와 자신의 출신과 의무 사이에서 고뇌하는 오스칼이 멋지고, 아름다웠다. 여장 남자의 신묘한 매력이라니.
알폰스 무하의 그림 속 여인들은 신화 속 여신들 같기도 하고, 순정만화 속 주인공들 같기도 하다. 여인의 극대화된 아름다움은 여백이 있는 곡선으로 표현되었다. 당대 최고의 장식 미술가였던 알폰소 무하의 포스터를 보면서 예술이란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잠깐이나마 환상에 젖어 보고, 더 나은 오늘을 살아가게 된다.
현실에서는 약하기 때문에 거칠고 딱딱하지만, 예술이라는 환상 속에서 우리는 따뜻하고 가벼워질 수 있다. 우리에겐 환상이 필요하다.
설거지가 끝났다. 녹턴도 멈췄다. 빨간 고무장갑을 뒤집어서 헹궈서 베란다 건조대에 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