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서커스 공연을 직접 본 것은 십 년 전쯤이다. 동춘 서커스단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공연을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러시아 미녀가 백개는 족히 넘을 듯한 훌라후프를 멈추지 않고 온몸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입과 양손을 이용하여, 접시 3개까지 완벽하게 돌렸다.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탁월한 균형 감각이었다.
서커스는 티브로 보는 게 익숙했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는 외국 서커스단의 신기한 공연을 보여 주거나, 마술사의 공연을 보여 주었다. 공중에서 그네를 타며, 그네를 바꿔 타는 장면은 아찔 했고, 반짝이는 화려한 옷을 입은 곡예사가 한 손을 높이 들고 외줄을 타면 잠깐의 순간 동안 숨을 죽였다. 다음 순간 와! 하는 함성이 들리고 줄타기에 성공한곡예사는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했다.
마술쇼에서 금발의 미녀가 관짝처럼 긴 상자 속으로 들어가면, 마술사가 얇은 철판을 상자 속에 밀어 넣는다. 그러면 분명, 몸이 절단되었을 것 같은 상황인데도 미녀는 웃으며 손과 발을 흔들었다.
다시 상자가 열리면 미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사뿐히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옆으로 밀어서 여닫는 문이있고, 다리가 네 개 있는 갈색 텔레비전 속의, 서커스는 절대 불가능이란 없어 보이는 신기한 세계였다.
유코히구치의 그림을 보았을 처음 보았을 땐, 유쾌하다고 생각했다. 풍선 때문인지 자유롭고 가벼워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써야 할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이 흘러갔다. 그러다, 그림을 가만 들여다보니, 글을 왜 쓰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림이 일관된 색깔로 표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즐거운 듯하나 거친 것 같기도 하고, 꿈꾸는 듯한데 다시 보면 투박하다.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 두려움도 읽힌다. 그림이 아름답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다.
작가는 왜 악어를 그렸을까?
날지 못하는 악어는 힘겹다.
힘차고 커다란 날개를 가진 새라면 어땠을까?
마음컷 비상하고 멋지게 자맥질을 하는 새라면
여행이 신나고 흥미진지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작고 여린 생명체들이 안전하지 않았겠지! 이것은 그들의 모험이며, 악어의 여정이다. 날지 못하는 악어는 자신을 묶고
있는 풍선과 바람에 의지해, 멈춰있는 듯 흘러가고 다양한 캐릭터들은 불안 속에서도 앞으로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날지 못한다고 해서 꼭 해로운 것은 아니다. 빠르지 않다고, 효율적이지 않다고, 답답하다고 바라보는 세상에서 악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변명조차 하지 못한다. 목소리조차 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유랑이 행복했으면 된것이다. 힘을 빼고 바람에 몸을 내어 맡긴 어느 날 악어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지나온 시간 속에도 바람과 풍선과 악어의 등이 있어서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을.
사유와 열매를 사랑하였으나, 행위로써만 인식되었던 날들이 지나고 쇼가 시작되면, 악어는 자신의 집인 물로 돌아가 시원을 찾아 유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