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든다섯이신 작은 아버지는 이 십여 년 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를 하셨다. 가난한 집 사형제 중의 막내아들이셨던 작은 아버지는, 쇠풀을 먹이고 나면 얼른 발을 닦고 고무신을 깨끗이 씻어 댓돌 위에 세워 놓고 작은 밥상 앞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는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의 선생님이셨다. 간혹 소풍길에 선생님들이 강아지 풀로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네가 박 선생님 조카라며?" 장난을 치기는 했다. 작은 아버지가 같은 학교의 선생님이라서 특별히 좋다거나 나빴던 기억은 없다.
말 수가 적으신 작은 아버지보다는, 사분사분한 작은 엄마와의 일화가 많다.
작은 엄마가 언니에게 사준 책가방을 내가 물려 쓰고, 일주일에 한 번 오는 학습지를 시켜 주셔서 학습지는 언니가 풀고 나는 만화를 재미나게 보았다.
작은 집은 학교 옆 동네에 있었다.
나는 가끔씩 하굣길에 우리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빙둘러가는 길로 가곤 했다. 작은집이 쪽으로 일부러 간 것이었다. 방 두 칸짜리 아담한 작은 집 마당에 들어서서 " 작은 엄마!" 하고 부르면 텃밭에서 풀을 뽑거나 부엌에 계시던 작은 엄마가 웃으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눈치가 없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작은엄마는 늘 반갑게 맞아 주셨다.
주스를 주시기도 하셨고 밥 먹고 가라며 밥상을 차리셨다. 그리고 집으로 갈 땐 백 원을 손에 쥐어 주셨다. 그때에 백 원이면 사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한 봉지에 이십 원 하는 라면땅을 다섯 봉지나 사 먹을 수 있었고 핫도그는 두 개나 먹을 수 있었다. 큼지 막 한 알사탕을 주머니 가득 불룩하게 넣고,혀를 굴려가며 부지런히 알사탕을 빨아먹노라면 한 시간 거리의 하굣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집에 다다라도 알사탕은 열흘은 먹을 만큼이나 남아 있었다. 작은 엄마가 싫은 내색이라도 하였다면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기억에도 작은 엄마는 꽤나 친절했다. 우리 형제들의 졸업식마다 꼬박꼬박 참석하셔서 사진을 찍어 주셨었다. 작은 엄마도애 셋을 키우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시대가 달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시조카들의 졸업식에는 한 번도 가본일이 없다. 물론 아이들 졸업식에 시댁식구들이 온 적도 없다.
내가 국민학교 사 학년쯤 되었을 때 작은 아버지는 인근의 시로 발령을 받으셨고, 작은 집은 이사를 갔다. 그리고 등교를 늘 함께 하던 세 살 터울의 언니가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나의 등굣길과 하굣길이 심심해졌다. 그 나이 때의 심심함이란 아마 외로움과 동의어 일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는 받아 보기 어려웠던 친절이 고파서 나는 먼 길을 돌아서 작은 엄마를 찾아갔을 것이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원체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 생신에 오셔도, 서로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으셨다. 어린 내가 보기엔, 형제 사이에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그러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엄마랑 작은 엄마는 유독 사이가 돈독하셨다.
이제는 사형제 중 세분이 돌아가시고 막내이신 작은 아버지만 살아계신다. 작고 동글동글 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작은 엄마는 가끔 만나도 늘 그대로다. 젊었을 적 키도 크고 뚱뚱했던 작은 아버지는 당뇨로 고비를 넘기시고오십 대쯤에 20킬로 가까이 감량하셨다. 그리고 계속 유지하고 계신다. 작은 엄마의 정성 어린 밥상과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진 덕분이다. 어디를 가나 꼭 현미 도시락을 싸 오신다. 근래에는, 근력이 많이 떨어지셔서 좀처럼 외출을 안 하신다는 작은 아버지는 몇 년 전 큰 조카의 결혼식에는 양복을 새로 맞춰 입으시고 참석하셨다. 그리고는 많이 웃으셨다. 예전의 말없고 표정 없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셨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교장'처럼 담대한 희망이 보이는 반듯한 양복이 아니었다. 한결 부드럽고 따뜻한 적갈색의 양복을 입은 작은 아버지는 막내의 안부를 물으며 울듯이 웃으셨다.
기억을 한 꺼풀 들춰 본다.
새로운 앎에 한 뼘 다가선다.
사람이란, 자라고, 크고, 나이를 먹는다.
삶의 위치가 달라지는 만큼 헤아림의 폭이 넓어진다. 나로부터 시작된 걸음은 또 누군가에게 한 움큼의 알사탕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