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영상 PD의 마지막 단상
생각해보면 우리는 수많은 선택에 놓인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짜장면? 짬뽕?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중에 골라.
주말엔 뭐하지? 쉴까 아님 놀까?
장바구니에 담아둔 그거 살까? 아니면 참을까?
1.
이직하기 전에 퇴사하지 말아라.
어느 잡지에서 그랬다. 갈 곳을 정해두지 않고 퇴사를 결정했던 많은 직장인들의 후회와 조언이 담긴 글이었다. 그 말이 내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나 보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면, 갈 곳을 구한 후여야 한다는 무의식이 있었다. 한동안 다음 직장에 대해 꾸준히 고민했었다. 생각이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나는 우울해졌다. 이직에는 몇 가지 국룰같이 지켜지는 사항들이 있다. 연봉은 더 높아야 하고, 업무 환경은 더 좋아야 하며, 나의 성장 가능성이 더 열려있는 곳이자, 나의 커리어와 회사의 니즈가 맞는 등등... 이것저것 재고 따지기도 전에 이미 지쳤다. 내 방향성과 맞는 회사는 (당장에) 없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해두지 않고 퇴사를 했다. 아주 추상적인 방향성만 있다. 다시금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 다만 이 모든 게 경제적 보상이 있지 않다. 회사에서의 일도 아니고, 사업이나 수익성 일도 아니다. 차곡차곡 모였던 돈이 빠져나갈 차례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 불확실한 일을 저질렀다. 나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올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이대로 커리어가 끊기는 건 아닐까...
여기까지가 내 선택에 대한 불안의 골짜기다. 이 골짜기는 더 고이고 고여 영역도 확장하고, 비린내도 풍겨갈 것이다. 경우에 따라 나에게 후회라는 감정을 유도하고 작아지게 만들 것 같다. 아주 고약한 골짜기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한번 해봤다.
2.
잘못된 선택을 해라.
'불확실한 기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나요?'
10년 가까이 등단이 되지 못해 소설 지망생 신분으로 지내야 해던 소설가에게 물었다. 많이 쓰고, 동료를 만들고, 때를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잘못된 선택을 많이 해보라고 했다. 그 말이 처음에는 뭔가 싶었다. 잘못된 선택? 실수를 하라는 건가? 한동안 그 말을 몇 번 곱씹어봤다.
우리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도 차선의 선택을 하려고 한다. 대학교 4학년 때 취업을 마음먹었던 것 역시도 불확실한 영화의 삶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고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싶은 나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나 회사를 벗어나고 싶었을 때 내가 떠올린 직관적인 계획은 이직이었다. 너무나 당연시되는 최선의 선택이다. 사회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수준을 유지하면서 원하는 방향성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합이 도출되지 않았고 괴로웠다. 안정, 돈, 원하는 것 이 3가지를 모두 갖추며 이직하기엔 지금의 나에겐 너무 버거운 도약이었다. 만약 계속해서 최선의 선택을 바라 왔다면 아마 퇴사는 못했을 것 같다. 지속적으로 회사를 찾거나, 적당한 회사를 찾아 차선의 선택으로 이직을 했을 것이다. 답이 안 나오는 생각의 굴레를 뒤집어봤다. 최선과 차선의 선택 말고 다른 경우는 없을까.
잘못된 선택은 당장에 없다.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건 선택 이후에 벌어진 결과에 대한 우리의 평가일 뿐이다. 그런데 잘못될 것 같은 선택은 있다. 나에게 이직 없는 퇴사가 그랬다. 무작정 퇴사를 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 못한 삶이 될 경우의 수 때문이었다. 그런데 잘못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말 그대로 생각일 뿐 아닌가?
나는 당장에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수준을 내려놓고 원하는 방향성을 선택하기로 했다. 말이 그럴싸하지 사실 답 없이 퇴사를 했다. 많은 위험요소가 따르니 자연히 불안의 골짜기도 생겼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불안이지 일어난 일은 아니다. 당연히 잘못된 선택도 아니다. 무모함이 있어야 다음 도전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워진 만큼 더욱 채우려 할 것이고, 잘못된 선택이 되지 않으려는 나의 발버둥이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적당한 안정 말고 막연한 가능성을 택했다.
잘못된 선택을 하라는 말은, 최선과 차선과 더불어 최악과 차악의 선택도 고려해보라는 말은 아니었을까. 최선과 최악 사이 어느 하나를 구분 짓는 건 나와 우리, 사회일 뿐이고 관념일 뿐이니 말이다.
잘못된 선택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의 과정이 부끄럽고 싶진 않다.
당장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훗날 잘못된 선택이 되고 싶진 않다.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이제 고민하고 부딪히고 극복하고 성장하며 원했던 모든 것에 다다르고 싶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될 것 같은 선택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