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된 학부모와 취약한 대표성
학부모는 교육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
'문제 학부모'라는 낙인과 암울한 노스탤지어 현상
한 교사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함께 애도하며, 그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던 수많은 교사들을 위해 고통에 대한 치유와 권리회복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 생활지도권 등 구체적인 권리 보장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모아진 공론의 공통분모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사의 권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형태로 보장되어야 하며, 그래서 학교 현장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가시화될수록 이를 둘러싼 각 이해관계자들의 논쟁과 학교 현장의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다만 이런 논쟁과 혼란 속에서도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한 집단이 있다. 바로 학부모다. 토론에 끼어들 틈도 없이 학부모 모두가 학교밖으로 내팽개쳐졌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교육문제는 '학부모'때문이라고 성토하는 듯하다. 졸지에 학부모 모두가 죄인이 되고 빌런이 되었다. 이제 이 빌런만 무찌르면 된다고 언론은 매일같이 '문제 학부모'의 만행을 지적하고, 교육당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제 학부모'를 학교에 얼씬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한다.
맹목적인 자식사랑과 가족이기주의, 그리고 지나친 욕심으로 비교육적 문제를 야기한 학부모는 지탄받아야 한다. 하지만 ‘학부모 전체'를 '교육을 망치는 주범’으로 사회적 낙인을 찍고, ‘학부모는 문제’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왜곡하여 부풀려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심각하게는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학부모 전체'를 비난하고 교육정책과 학교교육에서 '학부모'를 배제하려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가 차라리 나았다며 그동안의 교육 개혁 성과마저 무위로 돌리고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이런 류의 노스탤지어(향수,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심리 회복 기재)가 문제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은 비관적인 교육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자녀가 있는 사람이면 적어도 12년 동안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온전히 학부모가 된다. 따라서 학부모는 12년 동안 온전히 공교육과 학교교육의 틀에 자녀를 맡기고 보살펴야 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부모는 자녀를 맡긴 부모 된 처지로 학교에 수용적이며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학부모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로 규정해도 되는 것인가? 도대체 '학부모' 그 자체가 문제라는 이런 관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교육권력의 현실과 학부모의 취약한 대표성
일반적으로 학교교육의 3 주체를 교사, 학생, 학부모라 한다. 국가 수준의 교육 3 주체는 국가(교육청, 관료), 학교(교직원), 가정(학부모, 학생)이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교육 주체'라는 말은 '교육의 제반 사항에 대해 선택, 결정, 이행할 자유와 책임'을 가지는 주체를 의미한다."(김기수, 학부모와 공교육, 2019)
하지만 학부모가 현실에서 '주체'로서의 역할로 인식되고 이에 합당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는가. 대부분의 학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교육당국이나 교사뿐만 아니라 학부모 자신도 학부모가 교육 주체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는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실에서 공교육의 권력은 국가(교육당국)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여 왔고 80년대 후반 교육민주화 이후 학교(교직원)가 일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이종각, 학부모와 공교육, 2019) 하지만 학부모는 교육 권력의 가장자리에서 지원자, 보조자로서의 역할로 설정되어 왔고, 이 마저도 국가나 학교가 요구할 때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교육 관련 법률의 현실만 봐도 그렇다. 교육기본법이나 초중등교육법을 살펴봐도 국가의 교육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 국가의 권한과 역할, 학교의 권한과 역할, 교사의 권한과 역할은 법률에 비교적 분명하게 명시된 반면 학부모의 권한은 교육기본법 제13조와 초중등교육법상의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만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마저도 형식적으로 운영된다.
이처럼 교육 주체로서의 학부모는 법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취약한 대표성을 갖고 있다. 학교교육에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교육주체로서 학부모'를 인정하고 호명하지 않고 있다. 학교를 좌우할만한 권한이나 책임도 주어지지 않았다. 교총이나 전교조 같은 교사를 대표하는 조직처럼 학부모 전체를 대표한다고 인정되는 단체나 조직도 없다. 최근의 각종 교권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서 학부모 배제 흐름이 강화되는 것은 이 같은 학부모의 취약한 대표성도 한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육의 주체이면서도 교육 권력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인 학부모를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교육 당국은 문제에서 비켜나 심판자가 되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제대로 된 근본적 대책이 나올 수 없다. 손쉽게 모든 학부모를 빌런으로 만들고 책임을 덧 씌우며, 학교교육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주 나쁜 방식의 책임 회피 방법일 뿐 대책이 아니다. 학교교육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개혁 없이 교사와 학부모사이의 갈등 문제로만 상황을 축소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교권회복이 가능할까.
자치와 자율이라는 권한과 자정과 통제라는 책무
물론 학부모 스스로도 교육주체로서의 권한과 책임에 대한 각성이 필요하다. 여전히 자녀의 교육을 학교에 맡긴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학교와 교사에게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학부모가 많다. 하지만 자녀의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자녀의 첫 교사는 부모이며, 학교를 제외한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도 부모는 평생 교사이다. 따라서 학부모 권리만을 앞세워 교사들을 다그치기보다는 교사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협력할 방안을 모색하며 소통을 통해 신뢰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학부모들이 교육주체로서 권리를 행사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규율하고 정화하며, 학교교육에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또한 학부모 대다수는 교육주체로서의 집단적 인식보다 개별화되어 경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개별화된 학부모'라는 현실이 '문제 학부모' 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도록 방관하고 방치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현실로 인해 '문제 학부모'가 '학부모 전체'로 대표되어 원치 않는 린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들도 '문제 학부모'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다른 OECD국가들처럼 학부모의 자치적, 자율적 통제를 강화하는 학부모회의 법제화와 활용을 주장한다. 물론 최근 각 시도에 학부모회 조례가 제정되어 일부 학부모들이 학교교육에 보다 적극적인 '교육시민'의 목소리를 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조례의 한계상 교육주체로서 온전히 권한과 역할을 부여받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순 없다. 따라서 학부모회를 법률로 제정하여 법적 강제력을 가지는 권한 및 책무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개별화된 학부모가 아니라 '집단적 참여권'을 가진 학부모를 교육주체로 인정하고, 학교뿐만 아니라 각 시도와 교육부에 의견을 개진할 학부모의 대표기구들을 설치해야 한다. 늘 문제가 생기면 이름만 올려주고 시키는 대로만 하길 바라는 학부모 대표 말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역으로 낮은 수준의 학부모 권한마저도 박탈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공교육과 학교교육이 온전하게 제자리를 찾고 정상화되는데 학부모의 지지와 협력 없이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학부모를 배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꼬일 수 있고, 학교 현장의 상황은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게 될 수도 있다.
‘문제 학부모'관점에서 학부모를 배제하고 훈계하려는 교육정책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교육을 '학부모'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바라보려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교육정책과 학부모정책을 세우는 길이다. 공교육과 학교교육에 대한 투명한 정책 설명과 집행을 통해 학부모를 설득하고 주체적 참여와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교육문제 해결의 출발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