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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 Mar 25. 2022

아빠가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이유

캠핑과 싸구려 커피의 상관관계

오늘은 오랜만에 노래를 듣다가 장기하 신곡에 빠져 버렸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로 흔히 알려진 그의 밴드는 작년에 해체되었고, 고로 이젠 '장기하와 얼굴들'이 아니라 그냥 '장기하'가 됐다. 가난한 자취방, 혹은 고시원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곡의 감성과 푸념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라는 가사를 들었을 때, 눅눅하고 노리끼리한 옛날식 장판이 떠오른다면 그대 역시 이 노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싸구려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씩 먹다가, 다 먹고난 축축한 컵은 담뱃대로 쓰고. 며칠쯤 지나면 담배꽁초 더미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아버지의 오랜 습관이며 그의 남루했던 젊은 날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죽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 나는 나의 할머니가 한 분만 계신 것이 의아했다. 제사날이 되면 올라오는 사진 2장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하루는 아빠가 술을 거하게 마시고 들어와,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있었으면, 지금 너를 아껴주셨을 텐데"하며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얼마 전에 아빠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아빠는 고등학생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두 분을 따라 죽겠다며 다대포항 바다에 뛰어 들어갔다고 한다. 오래 전 그 겨울 바다가 아빠를 탐하지 않아줘서 나는 너무 고맙다. 


지금이야 집도 있고 차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은 초라함 그 자체였다. 밤이 되면 화장실 가기가 무서웠는데, 거실부터 화장실까지 가는 그 통로에 바퀴벌레가 많았기 때문이다. 불을 끄고 걸어가면 지나가는 바퀴벌레를 밟을 것만 같고, 불을 켜고 걸어가면 지켜보던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는 날개도 달려 있었기에, 뜬 눈으로 나에게 날아온다치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노란 장판을 뜯어 내면 모래가 스슥 나오고, 모래 사이 사이를 잘 살펴보면 개미 몇 마리가 줄지어 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한 마리씩 손으로 즈려 죽인 뒤에 휴지로 닦아내는 것은 내 주특기였고, 불을 껐다 키면 바퀴벌레 무리들이 보인다는 '썰'은 단지 '썰'만이 아님을 익히 경험한 바였다. 너무 많은 바퀴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차후에는 "존재하라. 그러나 눈에 띄지만 마라."하는 나만의 작은 철학들도 조금씩 정립하여, 그것을 어기는 바퀴들은 강력히 처단했다. 내 손으로, 가끔은 아빠 손으로.




나는 친구들이랑 계획해서 캠핑을 가려 하지 않는데, 그것은 웬만한 내 또래들은 아주 청결한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있던 개미 몇 마리를 데려와서 '엄마 저 오늘부터 개미집을 만들 거에요~' 하는 애들이야 있었겠지만, 내 방과 개미집은 사실 교집합임을 이해한 애들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함께 캠핑을 갔을 때 마주치게 될 산모기, 나방, 쥐, 바퀴, 딱정벌레, 장수벌레 뭐 이런 놈들은 여기선 그러려니 해야 한다고 알려줄 자신이 없었다. 잠자리, 반딧불이처럼 깜찍하게 생긴 곤충들도 물론 있지만 걔네는 조연일 뿐이다. 


우리 아빠는 캠핑 때마다 그런 벌레들의 습격을 막아주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불도 피워보고, 파스도 발라보고, 습기 없는 자리로 옮겨도 보고. 그러나 결과적으로 텐트 밖에서는 다양한 곤충들과 공존해야 함을 깨달았고, 때때로 이름조차 모르는 흉측한 벌레들이 있으면 대신 잡아주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따라서 엄마와 내가 텐트 안에서 신나게 고스톱 한바탕을 치고 있으면, 아빠는 텐트 밖에서 누구든 이겨라 외치고, 불도 피우고, 벌레도 잡고, 싸구려 커피도 한 잔 마시고 했던 것이다.


최근 아빠의 친척이 폐암에 걸려 하루 이틀 하는 상황에서, 아빠는 자기도 걱정이 된다며 보험을 3개나 더 들었다고 한다. 나는 몇 십 년째 밥 먹고 마시는 싸구려 믹스 커피부터 끊으라고 강경하게 경고했지만, 아직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 같다. 싸구려 커피마저 감성으로 만든 금수저 아티스트 장기하가 문제인지, 싸구려 커피밖에 없던 시절에 먹던 그것을 아직도 놓지 못하는 우리 아빠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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