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살짝 미적지근했던 날씨에 우린 처음 만났어. 이름도 나이도 어디에 사는지 아무 정보도 없이. 먼저 도착해 티켓을 뽑아 기다리고 있던 내게 커피를 사들고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는 넌 바로 눈에 띄었지. 우린 기억도 나지 않는 얘기를 하며 한 층을 더 올라갔어. 뭐 팝콘 줄이 너무 길다던가 언제 도착했냐 하던가 하는 어색하고 시시한 이야기들. 사실 그때 본 영화 제목이 뭐였었는지 기억이 안 나. 스크린에 집중하는 네 옆모습이 더 기억에 남거든. 영화가 끝나고 나와 담배를 피우려는데 너도 같이 핀다길래 좋았어. 난 아직 담배 피우는 여자가 더 매력 있거든. 석촌호수 바로 앞 가게의 테라스에 앉아 넌 사이다, 난 맥주를 마셨을 거야. 감자튀김 하나 시켜놓고 처음 보는 사이에 참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했지. 인생 얘기, 전 애인 얘기 등등... 그리곤 호수를 한 바퀴 돌았어. 한 쪽이 어디론가 튀는 대화가 아니라 서로 잔잔하게 물결치며 말하고 들어주고 하는 게 너무 좋았어. 나와 닮은 사람, 차분한 사람을 좋아하거든. 나와 결이 참 비슷하구나 생각했어. 너도 날 그렇게 느꼈고. 걷다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 먹었지 지금이나 그때나 이런 면에선 우린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싶어. 참 슴슴했는데 우리.
어디서부터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그때부터 였을 거야. 네가 내게 큰 잘못을 했던 그날 이후로 난 한순간에 신뢰가 무너졌거든. 그렇지만 참고 넘어가기로 했지.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다 생각했고, 그 이후로 내게 하는 네 모습이 기특했거든. 주위에 말하니 오히려 날 이상하게 생각하더라. 어떻게 그걸 참냐고 자기는 절대 그렇겐 못한다고 대단하다고 하더라. 사실 나도 내가 어색했어 이런 내 모습 속에서 나를 계속 잃어가는 기분이었거든. 그래도 우린 잘 만났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세 가지의 계절을 함께 보내며 이런저런 이뻤던 기억이 많네. 넌 운전하는 걸 참 좋아했지 그런 널 만나면서 나도 참 운전이 많이 늘었다. 마지막은 항상 쉽지가 않네. 나쁜 기억은 조금씩 미화가 되고 좋은 기억은 잔상이 그대로 남아버리거든. 우리가 만나는 동안 넌 세 번의 이사를 하지만 난 이 자리에 그대로 서있어. 매일 출퇴근길엔 잠시 차를 대놓고 함께 담배 피우던 도로를 항상 쳐다보곤 해. 그 장면의 우리가 아직은 너무 선명해서, 그렇지만 그 공기와 연기가 가슴에 아른거리는 것도 서서히 무뎌지겠지.
너에게 말하지 못하고 조금씩 정리를 해왔어. 당연히 잘 맞는 부분이 있으면 안 맞는 부분도 있는 법인데 너를 담은 내 눈에 비치는 시야가 점점 좁아져가는 게 느껴졌거든. 그러다 보니 끝이라는 게 보이더라.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벽이 조금씩 세워졌어. 갑갑하더라 내 마음이 막히니. 그래도 무시하려 했어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잘 안되더라. 그 와중에도 너를 보며 최선을 다하는 연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 나도 너에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하긴 했는데 넌 어땠을지 모르겠다. 참 이기적이지 미안해 노란 꽃을 좋아하던 너에게 난 무슨 색 꽃이었어.
할 말이 너무도 많은데 이렇게 글로나마 조금이라도 말하려고. 책이 나오면 내 글을 제일 먼저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지만 아마 제일 먼저 생각날 거야. 이 글은 온전히 너를 담은 글인데 네가 보지 못할 수도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비겁한 말이지만 휴지 잘 부탁해. 참 귀엽고 나를 많이 좋아했는데 아직 새끼니깐 건강하게 잘 보살펴줘. 꽤 긴 시간 동안 생각 많이 날 것 같다. 너도 더 아프지 말고. 행복하고.
잘 지내, 어디서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