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가 각기 다른 시간 속에 여전히
어렵게 찾아온 아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그때, 코로나가 터졌다.
방심하는 사이 마스크 한 상자 가격이 십만 원 가까이 치솟았고, 마스크의 공급이 쳐져서 사람들은 요일별로 줄을 서서 겨우 마스크 몇 개를 살 수 있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든 그랬지만 임신부였던 내게, 코로나는 공포였다. 한동안 사람이 많은 곳을 나다니지 않았다. 마스크를 받는다고 줄을 선 곳조차 피했다.
그렇게 웅크려있던 겨울이 지나, 가까스로 미약한 봄이 찾아왔다. 봄볕이 들자 태교 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벼이 콧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졌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속초로 차를 달렸다. 탁 트인 바다 전망을 보면 두려움으로 한껏 웅크렸던 마음이 기지개를 켤 것만 같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조금 여닫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길을 잘못 들어 목적지인 속초를 살짝 비껴 양양으로 간 김에, 낙산사에 들르기로 했다. 여행의 묘미였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과 함께 속초를 가다가 실수로 양양에 가는 바람에 낙산사에서 동종도 울리고 해수관음상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온 추억'이 생겼다.
5년이 지나, 친정식구들과 함께 양양여행을 계획하며 낙산사에 가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남편과 함께 갔던 그 여행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 우리는, 마침 가지고 있던 상품권으로 바람막이 한벌씩을 장만했다. 바람막이 재킷은 초봄의 쌀쌀한 공기를 막기에 무척 적절했다. 코로나가 창궐한 세상 속에서도, 무언가가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막이 재킷이었고, 남편의 애정이었고, 서로를 향한 신뢰였고, 어떤 희망이었다.
낙산사의 동종 앞에서, 이제 만 5세가 된 아이가 통나무를 당겨 종을 울렸다. 잔잔하고 정갈한 소리가 바다를 마주 보고 선 관음상 주변을 휘감아 돌았다.
설레고 걱정됐던 양양 여행, 하필이면 주말 내내 그어진 비소식에 울적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출발하던 날은 바짝 개어있었다. 해가 반듯하게 비쳐든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아이의 웃음소리로 반짝였고, 나도 모처럼 즐거웠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당신이 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중이 아닐까. 그때 당신이 쳤던 그 종소리가, 오늘에 와닿고 있는 게 아닐까.
짧은 여행이 끝나고 집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아이가 시무룩하게 말한다.
"엄마, 양양 바다가 그리워..."
종잇장처럼 얇은 시간이 그리움이 되어 겹겹이 쌓여간다.
남편과 나의 시간 주위로, 아이와 나의 시간이 겹쳐져 우리는 점점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