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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리더라도 기억할게

오늘 네 고백을 내 마음속에 문신 새기듯이 적어둔다

by 나리다

"엄마. 아빠 보고 싶다."

"응? 갑자기 왜?"

"아빠가 있었다면 내가 아무리 무거워도 안아줬을 거 아냐. 나랑 같이 재미있게 놀아주고..."


남편을 잃은 뒤로 내가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다. 내가, 내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자기 연민이라면, 나는 아직 네가 나의 탯줄에 붙어 있 걸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긴다는 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는 나에 대한 기만이며, 너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너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 나의 불이다. 어느 쪽이든 결국 나의 모자람 때문이므로 한없이 가라앉고 말 것었다. 그게, 두려웠다.


아이의 담담한 말은 그리움이라기보단 소소한 아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순간, 민과 자책이 뒤섞이며 울컥 눈물이 났다. 마음이 약해졌나, 당신을 잃어버린 그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가.

나는 너를 아기처럼 내 배 위에 엎드리도록 안아 올리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아 엄마가 안아줄게, 네가 아무리 무거워도 안아줄게."


오늘 아침에는 아이에게, '너 이제 무거워져서 막무가내로 안기거나 부딪쳐 오면 엄마가 너무 힘들어. 엄마가 놀라지 않게 똑똑, 하고 살며시 안아줘.'하고 당부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씩이나 사랑의 코뿔소처럼 부딪쳐오는 아이에게 신경질 냈던 것이 모조리 화살이 되어 내게 꽂혔다.


"엄마가 재밌게 놀아주도록 더 노력할게."

놀아준다고 앞에 앉아있다가도 그새를 못 참아 벌렁 누워 등 돌리고 핸드폰을 하던 순간들은 몰매가 되어 나를 때렸다.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말했다,


"고마워 엄마, 엄마 덕분에 오늘 키즈카페 가서 재미있었어.

그리고 엄마가 종이로 책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악어도 그려주고, 토끼도 그려주고 나 책 만들 수 있게 글씨도 가르쳐주고, 책 만드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 그게 나랑 놀아주는 거야. 정말 고마워."


저녁을 준비하는데 자꾸만 놀아달라는 아이에게, 나는 종이 여러 장을 반으로 접은 뒤에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책처럼 만들어주었다. 그리곤 여기에 동화를 그려보라 꼬셨다. 아이가 낙서를 하며 혼자 노는 동안 저녁준비 할 시간도 벌고, 더불어 한글 공부도 되면 좋고 아님 말고 하는 마음으로 꾀를 낸 것이었다. 색칠공부하라고 악어도 그려주고 토끼도 그려주었다. 아이가 쓰고 싶은 내용을 불러주면 따라쓸 수 있게끔 옆에 적어주었다.


그런 놀이였는데.


고마움을 가득 담은 아이의 순수한 고백에, 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 묵음으로 폭풍 오열을 하였다.


그런데 나는 요즘 돌아서면 자꾸 뭘 잊어버려서, 너의 소중한들을 금세 잊을까 걱정이 되었다. 너의 말 한 올 한 올을 모조리 문신으로 새기고 싶는 생각이 들었다.


"민아 네가 오늘 엄마한테 한 말들, 엄마 평생 기억할 거야. 마음속 깊이 적어두고 민이가 엄마 힘들게 할 때, 엄마가 너를 힘들게 할 것 같을 때, 꺼내서 되새기면서 네가 엄마를 우주만큼 사랑했다는 거 꼭 기억하고 힘낼 거야."


하고 말한 뒤에 절박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아, 메모해야 돼, 안 그러면 나 까먹어, 이거 진짜 잊으면 안 돼....


필사적인 마음으로, 감동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었는데.


"근데 민아 얼른 자, 네가 자꾸 안 자서 엄마 까먹을 거 같아. 얼른 적어야 안 까먹는단 말이야...."


엄마, 기억 못 해도 괜찮아. 그래도 나 행복해.


아니, 오늘 너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엄마한테...

다시금 묵음으로 오열,


단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 결국 애가 잠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장에 한참을 써 내려갔다. 두서없지만 되도록이면 기억나는 대로 토씨 하나 빼먹지 않으려 애쓰며. 그러자 아이가 소곤거리며 또 말을 걸어온다.

"엄마 기억나는 게 많아?"

"응(네가 자꾸 말 걸어서 까먹을 거 같아)"


"아 고마워. 기억 다 해줘서."


그러고는 이어지는 너의 천진난만한 걱정.

"엄마 핸드폰에 쓰길 잘했다. 근데 내일 아침까지 안 지워질까?"


어, 그럼. 걱정 마. 엄마가 몸에 문신으로 새기듯이 글로 적어두고 죽기 전까지 기억할 거야. 엄마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 꼭 잊지 않을 거야.


내 보물아,

엄마한테 와줘서

진짜 진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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