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다정한 순간들이, 나를 살게 한다
사이렌이 울렸다.
"민아, 고개를 숙이고 인사해야 해. 이건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돌아가신 분들께 인사하라는 신호야. 오늘은 그런 분들을 생각하기 위한 날이야."
그리고는 덧붙여 말했다.
"민이 아빠도 국가유공자야. 나랏일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돌아가신 거야."
"왜? 왜 돌아가셨는데?"
"그건, 민이가 좀 더 크면 얘기해 준다고 했잖아. 꼭 얘기해 줄게."
어제저녁, 조촐한 인원이 모여 친목을 위해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어쩌다 남편 얘기가 나왔던지,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술 먹고 우는 주사는 없었는데, 남편을 그렇게 잃고, 태연한 척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한이었던지, 술을 잔뜩 마신 김에 그게 쏟아져 나온 모양이다.
그냥 마구 눈물이 쏟아졌는데, 아마 내 마음속에 내내 무언가 억울함과 울분이 쌓여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또. 그립고 외로웠을 것이다.
같이 술 마시던 사람들의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표정과 난감한 끝의 궁색한 위로들이 얼핏 기억난다. 한 사람은 다음날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 적당히 술 마시다 집에 가고 싶었는데 내가 대차게 우는 바람에 이도저도 말 못 하다 결국 느지막이 귀가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의 민폐 주사가 부끄럽기보다 웃겼다. 비극인데 희극적이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아마 다신 나한테 술 먹자 안 할 것이다.
아침에 눈이 퉁퉁 부어서는 어린 아들 앞에서 토할 것 같다고 진상을 부렸더니 아이가 나를 달랜다.
"엄마 불쌍하다... 가서 변기에 토하고 와. 안 나오면 좋은 거구."
..... 철없는 엄마 밑에서도 아이가 예쁘고 티 없이 자라 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철이 좀 없는 엄마이긴 해도 밖에 나가선 제법 멀쩡한 편이다.
한 친구는 내가 평소에 너무 밝아서 그 사건의 당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나에게 밝은 모습이 있다면 그건 억지로 꾸며낸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원래 밝고 잘 웃는 사람이다. 자잘한 걱정이 많은 것에 비해 긍정적인 생각도 많이 하고, 타인을 대할 때도 되도록이면 편견 없이 좋게 보려 한다. 속은 어떻든지 간에 교양 있는 척하려고 매일 매 순간 애쓴다. 아무튼 겉으론 평범해 보일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선 어찌 살까.
칼로 생살을 베어내는 것 같던 그 날카로운 아픔을 부둥켜안고는 살 수가 없었다. 사람을 망각의 동물이라 하는데, 진짜 뇌손상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잊나, 그 참렬한 고통을.
그건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생생하게 휘몰아치지만 그저 애써 꺼내지 않고 살 뿐이다. 담담한 척하며. 그러다 어느 한순간 굽이쳐 솟아올라도 그냥 그 순간 그 감정조차 내가 안고 가야 하는 내 삶이구나 받아들이며.
정수기 앞에서 냉수를 들이켜고 있는데, 애가 아침밥을 먹다 말고 나를 부른다.
"엄마 일로 와봐,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그 말에 나는 홀린 듯이 아이 앞에 섰다.
아이가 부드럽게 내 목을 두 팔로 감아 끌어안아주었다.
아이에게서 달달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났다. 나도 힘껏 아이를 끌어안았다.
"진짜 행복하다. 고마워."
고맙고 다정한 순간들이, 나를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