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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후반생을 걸어 가는 법

by 장용범

눈이 많이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 덕에 세상을 뒤덮은 순백의 향연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이런 풍경에 생각나는 시는 '눈 덮인 길 함부로 걷지 마라'는 한시이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요즘 나는 성공에 관한 자기 계발서를 읽지 않는다. 나이 탓이겠지만 성공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현재의 지위를 두고 "그 사람 성공했네"라고 하면 '언젠간 내려올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사업이 아닌 이상 아무리 큰 기업의 사장 자리도 잠시 머무는 자리일 뿐이다.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한 직장의 높은 직위에 올라가는 것은 실력만이 아니라 우연, 학맥, 인맥, 정치 등 온갖 요소들이 뒤섞인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아무리 잘 하고 있어도 후배나 경쟁자에 의해 언제든 내쳐지는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직위로 평가되는 성공이 그러했다.


주식, 부동산 등 돈벌이에 관한 책도 잘 안 보게 된다. 자본주의 세상이니 출세보다는 부자 되는 게 더 나은 성공 같지만 이것도 그 사람이 지닌 운이 크게 작용하는 걸 아는 까닭이다. 또한 후반생을 시작하면서 죽을 때까지 돈만 좇다 가는 삶이 그다지 바람직한 것 같지도 않아서다. 전반생은 그럴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상승의 욕구가 충만하니 말이다. 하지만 나이 60을 바라보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기껏 20년 남짓이다. 그것도 건강 나이로 치면 70에서 75세 정도이니 앞으로 10년, 15년에 불과하다. 이 기간에도 돈만 좇다가 더 나이 들어 그 돈을 병원비로 쓰는 게 과연 잘 사는 삶인지 회의가 들었다. 의사들의 속마음은 이렇다고 한다. "여러분, 열심히 돈을 버세요. 그리고 나중에 제게 다 가져오세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세태로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요즘 밥 굶는 사람은 없다. 다른 나라 원조까지 하는 나라가 제 나라 국민들 밥 굶길 정도로 복지가 빈약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60 이후 후반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부자거나 아니거나 하루 세 끼 먹는 것 똑같고, 전세든 자가든 비바람 피할 집 하나 있고, 사계절 제 몸 감쌀 옷이 있다면 사는 게 뭐 그리 다를까도 싶기도 하다. 오히려 노인들에게는 돈보다는 자신의 치아나 관절 건강한 게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후반생을 살아가는 지금 소복이 쌓인 내 인생의 눈길을 이렇게 걷고 싶다. 먼저 인생의 3분의 2를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여기서 더 지위나 돈, 명예를 좇는 것은 힘에도 부치고 예전만큼 의미도 덜 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겠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은퇴하고 벌써 2년이 지나버렸다. 앞으로 70까지 기간은 또 얼마나 빨리 올 것인가. 이제는 남들이 알아주는 외형적 가치 말고 스스로 만족할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자.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다우려면 나에게 중심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살아온 경험이 의미 있으려면 타인이나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바도 있어야겠다. 후반생을 산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을 가는 것과 같다. 전반생은 세속적인 추구여서 사람들 대부분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내 발걸음이 내 인생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첫걸음이 된다. 한 발, 한 발, 신중히 내디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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