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 aint heavy Mar 19. 2021

흉터가 될 수 있을까?

 사회 생활을 통해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사랑 듬뿍 받고 자란 것 같다.', '귀하게 자란 것 같다.'란 말을 종종 건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버리거나, '칭찬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나를 가까이에서 봐온 사람들은 내 삶이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테지만, 사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다.


 나는 나의 흉터와 상처를 숨기며 살아가고 싶었다. 비록 속은 곪아 터지고, 진한 흉터의 흔적이 남아있었을 지라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냥, 사랑만 뿍 받으며 살아온 새침데기 같 보이고 싶었다. 어쩌면 여전히 상처 입은 그 부위가 흉터로 남을까봐 안 아픈 척, 괜찮은 척, 모른 척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렇게 하면 흉터 대신 새살이 돋아날 줄만 알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흉터가 보기 싫은 것만은 아니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한 어머니 그 흉터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 흉터는 아이를 잉태하고 탄생시킨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장기를 이식해주고 생긴 흉터는 어떠한가?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삶에 대한 가치가 고스란히 담긴 흔적이다. 인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 속에서 사투를 벌인 소방관이나 경찰관의 흉터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러한 흉터들은 부끄러움이 아닌 훈장과도 같은 당당함에 가까울 것이다.




"니 동생 애자잖아."

"좀 그렇긴 하지만... 장애 동생이 있는 게 니 잘못은 아니니까."

"홀어머니에, 온전치 못한 동생까지... 밖에선 집안 얘기하지마. 너한테 실이 될 뿐이야."

"집안 조건만 빼면 괜찮은 애지."


 늘 누군가로부터 거절을 당할 때 들었던 말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나는 거절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일부분은 여전히 상처로, 또 일정 부분은 흉터와 같은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제는 더 이상 그 상처와 흉터를 남기기 싫어서 내가 먼저 문을 닫아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을 계속 모른 척 할 수도, 괜찮은 척 할 수도 없다. 장애가 있는 동생과 3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온 것도, 그로 인해 수많은 거절을 겪은 것도 모두 내가 살아낸 내 삶이었다. 또한 그로 인한 상처와 흉터는 그 거절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낸 내 삶의 징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머니의 흉터나 소방관의 흉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내 나름 부끄럽지 않은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는 위안 흉터라 생각한다.




 흉터는 상처가 아물었단 뜻이기도 하다. 상처는 여전히 욱신거리고 아프지만, 흉터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그 날의 사건과 흔적만 담고 있을 뿐이다. 그 흔적조차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추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실 아직은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 흉터를 감추기 위해 덧칠을 하고, 다른 무언가로 덮고,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도록 감추곤 한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언젠간 그 흉터조차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그 뒤엔 당당함도 남길 수 있을까? '흉터가 되어버렸다.'가 아닌 '흉터를 꽃피웠다.'란 말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나도 흉터가 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