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프 시립 박물관 2

몽생미셸 가는 길 51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19세기 인상파 화가 앙투안 기유메가 그린 풍경화


디에프는 영원한 항구도시였다. 노르망디 공국의 기욤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루이 나폴레옹도 디에프 사람들처럼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항구를 통해 드나든 사람들이 대체 얼마나 많았던가? 항구에 선적된 물품들은 또한 얼마나 흘러넘쳤던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프리카에서 운반해 온 코끼리 상아였다.


디에프에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운반해 온 코끼리 상아가 널려 있었고 그것을 갖고 디에프인들은 작품을 만들었다. 장식품, 파이프, 지팡이, 심지어는 성물(聖物)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공방에서 쏟아져 나온 상아 제품들은 프티 부르주아의 취향에 맞춰 제작된 것들이다. 한때는 레이스가 권력을 상징했듯이 이제는 상아가 레이스를 대신했다.


코끼리 상아로 제작된 성모 마리아 상에 입 맞추던 경건한 가톨릭 신자들은 신교도들을 탄압했고 구교도들의 칼날이 무서웠던 위그노들은 험한 바닷길을 건너 신대륙으로 도망쳤다.


이후 그들의 후손들이 선조들 땅이 히틀러의 광기에 위태로워지자 디에프를 구출하고자 달려왔다. 바닷가에는 캐나다 병사들이 절벽 아래 독일군의 포화에 스러져간 죽음을 애틋하게 여겨 디에프 시가 제작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무엇으로 풀 것인가? 설명해야만 하는가?


마담 루아얄로 불리던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로 프랑스 대혁명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베르사유에 나타난 그녀는 다시 7월 혁명으로 망명길에 올라 디에프를 찾았다가 영국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박물관에는 그녀의 젊었을 때로 추정되는 초상화 한 점이 걸려있다. 초상화는 망명자의 마지막 루트가 디에프였음을 또한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녀는 살아생전 고향땅을 다시 밟는 행운을 누렸지만 그것도 잠시, 쓸쓸하게 디에프 항구에서 고향땅을 등지고 다시 망명지로 향해야만 했다.


그녀의 초상화를 마지막으로 박물관 문을 나선다. 햇살이 환한 정오이지만 관람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입구에서 마주쳤던 박물관 직원이 성벽에 걸터앉아 집에서 싸 온 듯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일터로 향한다.


나 역시 이제야말로 점심을 미룰 수만은 없어 퓌살레 광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박물관에 처음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마주친 관람객이 고작 열 명도 채 안 되었으니 카페테리아가 있다 할지라도 장사가 안 됐을 것은 뻔한 이치다.


아니면 카페테리아가 들어서면 관람객이 더 늘어날 수도 있으려나? 정오를 지난 시계 추가 짧은 오후로 질주하는 때에 아직 돌아볼 곳이 두 곳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생 레미 성당과 생 자크 성당!